30편이 넘는 장편영화를 연출했고 영화 제작 현장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려온 영화적 궤적을 정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는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감독 중 하나이지만 그가 구축해낸 동화 같은 세상과 피와 살이 튀는 어두운 드라마를 가로지르는 일은 여전히 버겁고, 영화들을 연대기 순으로 배열해 봐도 개별 영화가 품고 있는 활력과 긴장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어나거나 때로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도 스필버그의 영화를 떠올릴 때 우리가 공유하는 인상들은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꿈과 환상, 우정과 모험, 미국적인 가치, 아버지들과 집, 가족의 위기와 봉합 같은 단어들로 설명된다. 이런 단어들과 함께라면 스필버그의 영화를 어느 정도 계보화 하는 작업도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동시에 말하고 싶다. 앞서 나열한 주제들만큼이나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건 과도하게 쏟아지는 빛, 빛을 등지고 선 인물들 주변에 드리운 그림자, 피어오르고 흩날리는 연기나 눈 그리고 유리창이다.


스필버그가 2002년에 연출한 <캐치 미 이프 유 캔>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훗날 희대의 사기꾼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프랭크 에버그네일 주니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대리 교사 행세를 하다가 적발되었고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와 있다. 그의 어머니가 교장실에서 유리창 너머로 천진하게 장난을 치는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때 불현 듯 누군가가 유리창 너머로 지나간다. 줄곧 투명하게 프랭크의 얼굴을 보여주던 유리창의 성질은 일순간 바뀌고 짧은 시간 동안 유리창에는 어머니의 근심어린 표정이 반사되어 비친다. 이 찰나의 장면은 갑작스레 유리창의 특성을 환기한다. 우리는 유리창을 통해 그 너머의 대상을 보지만 동시에 유리창에 반사되는 대상, 그러니까 유리창 너머를 보고 있는 자기 자신도 본다. 유리창은 수많은 영화가 사랑하고 매혹당해 온 사물들 중 하나다. 유리창은 공간을 나누는 경계로 작동하면서도 시선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지 않으며 그 투명함의 정도에 따라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자동차 안의 인물과 창문 위로 비치는 바깥의 풍경들은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스필버그 영화 속 유리창들은 ‘스필버그의 유리창’이라는 이름을 붙여 더 들여다보고 싶어질 만큼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유리창은 반사와 투과가 동시에 일어나는 사물이다. 스필버그는 유리창의 이러한 성질을 줄곧 효과적으로 사용해왔다. 그것이 유리의 성질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안경이나 렌즈도 그러한 예시에 포함될 것이다. <죠스>(1975)의 한 장면에서 식인 상어의 출몰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서장 브로디는 식인 상어에 대한 책을 뒤적이며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보는데, 그의 심각한 표정 위로 커다란 안경에 책장의 펄럭거림이 뚜렷하게 비친다. <A.I.>(2001)의 후반부, 로봇 소년인 데이빗은 바다 속 버려진 테마파크에서 비로소 피노키오를 인간으로 만들어준다는 푸른 요정을 본다. 그는 하늘을 날기도 하고 잠수 기능도 있는 미래의 자동차 안에 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전면 유리 밖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데이빗이며 이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푸른 요정의 얼굴이 유리창 위로 반사되어 그의 얼굴에 겹친다. 도심에 나타난 외계인의 갑작스런 공격과 도망치는 사람들을 담아낸 <우주전쟁>(2005)의 무시무시한 전반부에서는 건물의 전면 유리 밖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 위로 공격을 준비하는 트라이포드가 반사되어 비친다.


스필버그 영화의 대부분에서 이런 장면들을 골라낼 수 있다. 이 장면들에서는 유리창의 성질 때문에 대상을 보는 주체와 주체가 보는 대상이 한 화면에 담기는 사태가 발생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포개어진 시점숏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장면들은 과도하게 의미화 되기보다 어느 정도 서사의 필요에 부합하는 기능과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죠스>의 장면에서는 브로디의 골몰을, <A.I.>의 장면에서는 데이빗의 간절한 소망을, <우주전쟁>의 장면에서는 위험 앞에서도 홀린 듯이 그것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이와 같은 장면들은 각각 영화 속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지만 공통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시선이 작동한다’는 느낌이 그것이다. 이때 유리창에 비친 책, 푸른 요정, 외계인이 타고 있는 트라이포드는 그냥 우연히 거기 비친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필요와 욕망에 의해 시선이 당도한 대상이다. 그러니까 일련의 장면들에서는 마치 시선이 유리창의 반사를 작동시킨 것처럼 보인다. 스필버그에게 유리창은 시선의 주체와 대상이 모여들고 작동하는 영화적 장소이다.


그러고 보니 스필버그 영화의 숨은 주제는 언제나 보거나 보지 못한다는 행위와 그로인한 파장이 아니었던가. 그의 초기작인 <죠스>의 보이지 않는 식인상어와 상어의 시점숏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이며, <미지와의 조우>(1977)는 UFO를 목격한 후 눈앞에 자꾸 떠오르는 형상을 직접 보기 위한 열망과 여정의 영화이기도 하다. 스필버그가 1971년에 연출한 장편 TV영화 <대결>은 영문도 모른 채 대형 트럭에 쫓기며 목숨을 위협받는 승용차 주인이 주인공인데, 모든 사태가 종결된 영화의 최후반부에 이르러서조차 영화는 트럭 운전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최근의 영화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주전쟁>은 영화 전반에 걸쳐 재난의 과도한 목격이라는 문제가 제시되며, 미래의 범죄를 보는 아이들과 그것을 영상의 형태로 대면하여 범죄를 막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에서 신원을 식별하는 수단은 다름 아닌 눈을 조사하는 것이다. <링컨>(2012)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는 링컨이 초반부에 꾼 악몽에서 본 형상을 결국 후반부에 이르러 실제의 삶 속에 반복하는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다.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유리창의 형상들이 출몰하고 그의 영화들이 본다는 행위로 느슨하게 엮일 때, 명료하게 정리할 수는 없지만 이 두 사태 사이에 무언가 연관성이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힘들다.


많은 이들이 <우주전쟁>을 보고 스필버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여기 등장하는 외계인들은 우정이나 교감의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공격만을 목표로 하는 공포의 대상이며,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주인공 레이는 영웅의 면모라고는 전혀 없는 인물이다. 공격받아 죽은 이들의 옷가지가 어두운 하늘에 휘날리고 강물에는 끝없이 시체가 떠내려 온다. 재난에 대한 분석이나 대처와 같은 재난영화의 클리셰 없이 갑작스레 죽어버리는 외계인들을 마주하는 결말은 전에 없던 허무함을 안긴다. 이 어둡고 공포스러운 영화는 스필버그가 이전에도 보였던 ‘사실주의 드라마’의 행보와도 구분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영화에서 유리창이 깨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주전쟁>에는 가운데가 깨져 구멍 뚫린 유리창의 형상이 세 번 등장하는데, 초반부 야구공에 깨진 레이의 집 창문, 중반부 레이 가족의 차를 빼앗고자 달려든 피난민들에 의해 깨진 자동차와 후반부 레이가 숨어들었으나 트라이포드에 의해 내동댕이쳐진 자동차의 전면 유리가 그것이다.


스필버그에게 유리창은 시선이 작동하는 장소였으므로, 여기서는 시선의 작동이 깨지기 시작한다. 과도하게 눈앞에 몰려든 재난의 풍경은 단지 보인다는 말을 넘어서 눈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하늘에서 번개가 계속해서 내려치고 땅에 금이 가며 기괴한 형상의 트라이포드가 솟아오를 때에도 사람들은 위험 앞에 서서 이것들을 구경한다. 이 영화의 즐비한 무시무시함 중에서도 유난히 섬뜩한 정서를 남기는 장면은 전투기와 탱크가 몰려들어 말 그대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언덕 너머로 레이의 아들인 로비가 가고자 할 때 있다. 로비는 계속해서 도망치는 것만을 생각하는 레이에게 적들에게 맞서 싸우고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처음부터 말해온 인물이다. 참상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한 언덕 너머로 가려는 로비를 붙잡고 레이는 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로비의 답변은 이전과 같지 않다. 그는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해요. 나는 그것을 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언덕 너머를 향해 뛰어가고 있고 로비의 눈은 형용하기 어려운 열망으로 빛난다. 이 장면에서 로비는 자기 시선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재난의 장광에 자석처럼 이끌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자신의 강렬한 의지로 ‘그것을 보러’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아마도 그 점이 우리를 섬뜩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에 비하면 레이는 부족한 아버지이긴 해도 레이첼의 눈을 가려 재난을 보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두 아이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유리창을 처음으로 깬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이다. 영화의 초반부 그는 대개의 이혼한 가정이 그렇듯이 주말을 맞아 두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로비와 뒷마당에서 캐치볼을 하던 레이는 말대답을 하는 로비에게 점점 더 세게 공을 던지고 로비는 공을 받지 않는 것으로 응수한다. 날아간 야구공은 유리창을 깨며 로비는 자리를 떠나는데, 이때 집 안에서 깨진 유리창 너머로 마치 레이를 바라보는 것 같은 숏이 따라붙는다. 이 순간 레이는 주체 없는 시점숏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내내 피해자로 그려진 레이가 사실은 재난과 동등한 사태로 여겨지는 시선에 대한 공격을 최초로 행한 인물이었다는 아이러니와 함께, 시점숏의 주체와 대상이 명확히 구분되며 그 시선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관념이 얼마나 허약한가에 대한 경고가 새겨져있다. <우주전쟁>이 스필버그에게 일종의 변곡점이라면, 그것은 이 영화가 유리창을 깸으로써 유리창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유리창은 시선의 취약성을 은폐하고 그것을 견고하게 붙드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 영화에 도사리고 있다.


<스파이 브릿지>(2015)에서 스필버그는 유리창의 견고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본다. 이에 관해서는 영화평론가 허문영이 이미 그의 탁월한 평문을 통해 언급한 바 있다.(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2015년 사사로운영화리스트, 스파이 브릿지, 허문영) 각각 억류된 소련 스파이와 미군, 미국인 학생의 교환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변호사 도노반(톰 행크스)이 베를린 장벽을 지나는 전철과 뉴욕으로 돌아와 출근을 위해 탄 전철에서 바깥을 보는 같은 구도의 두 장면이 그것이다. 두 장면에서 도노반은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청년들과 뉴욕의 담벼락을 뛰어넘는 빈민가의 아이들을 본다. 이때 전철의 유리창은 바깥의 처참한 현실을 보는 도노반과 그가 보는 풍경사이에서 견고한 물리적 간격이 되어 도노반의 시선을 흡수한다. “영화는 현실을 보고, 관객은 영화로 현실을 본다는 말은 거짓이다. 정면으로, 존재론적 격리 없이, 본 경험의 즉각적 무화 가능성 없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앞의 글) 이 단단한 유리창은 시선의 주체와 시점숏 사이의 간극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며 본다는 문제 앞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또 하나의 유리창이 있다. 이에 대해 말하기 위해 유리창에서 반사와 투과의 문제를 분리해봐야 할 것 같다. 오직 반사만이 가능한 유리창은 다름 아닌 거울이다. <스파이 브릿지>는 거울에서 시작한다. 소련 스파이 에이블(마크 라일런스)이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도노반이 에이블을 살려둘 필요가 있다며 판사를 설득하는 장면에서 여러 개의 거울사이를 오가며 만들어내는 리듬은 유려하며 감탄스럽다. 또는 이 영화 전체를 거울상의 영화라고 말해볼 수도 있다. 두 스파이가 있고 두 이념이 있으며 반복되는 두 장면(전철의 유리창)이 있다. <스파이 브릿지>를 거울의 영화라고 불러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이블의 그림이 이 영화를 유리창의 영화로 만든다. 그는 소련으로 돌아가면서 도노반에게 우정의 선물로 초상화를 남긴다. 그림은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이다. 이 영화에서 유리창은 반사와 투과의 두 방향으로 분리돼있는 것이다. 혹은 이것들을 합쳐야만 비로소 유리창이 된다. 처음의 거울과 마지막의 초상화, 이 멀리 떨어진 거리를 통해서만 드디어 시선은 작동하며 도노반과 에이블은 시선을 나누고 우정을 나눈다. 이제 스필버그는 유리창의 다양한 운용을 통해 감춰진 시선의 문제를 언급하면서도 자신이 매혹되었던 유리창의 형상을 결코 폐기하지 않고 다양한 형식을 탐구하며 그곳에서 시선의 교환과 우정의 가능성마저 찾아낸다.


스필버그가 2011년에 연출한 <워 호스>에서도 이러한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세계 1차 대전의 군마로 차출된 말 조이가 고난의 여정을 거쳐 원래의 주인 알버트와 만나며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대지의 풍광과 말의 운동에 집중하며 결코 잊기 힘든 감흥을 남긴다. 스필버그 영화의 독립적인 유리창들은 여전히 풍성한 시각적 즐거움을 주지만, 동시에 <우주전쟁>의 깨지는 유리창이나 <스파이 브릿지>의 분리된 유리창과 같이 ‘또 다른 유리창’들이 있고 이는 때로 유리창의 역할을 하는 다른 무언가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워 호스>에서 그것은 다름 아닌 조이의 눈이다. 영국의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조이는 군마로 차출되면서 전장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조이가 짧은 우정을 나누게 되는 한 소녀가 있다. 풍차 안에 남겨진 조이를 소녀가 찾아내면서 둘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그 장면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화면을 가득 매운 조이의 눈에 문을 열고 빛과 함께 들어오는 소녀의 모습이 비치는 것으로 마주침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모습이 눈에 담긴다는 상투적인 어구를 이 장면에서와 같이 간단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조이의 눈은 투명하고 순수한 마주보기의 장소인 것처럼 느껴진다.


후반부에 이르면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마주보기가 등장한다. 조이가 옮겨진 영국군 막사에는 눈을 다친 알버트(제레미 어바인)가 치료를 받고 있으며 알버트는 그 기적의 말이 조이임을 단번에 직감한다. 눈이 흩날리는 어두운 밤, 병사들에 둘러쌓여 둘은 마주선다. 조이는 진흙과 상처투성이에 알버트의 눈에는 붕대가 감겨있지만 여기에는 조이의 용기와 그가 가져온 희망이 있고 역경과 장애물을 뚫고 만난 두 친구의 애틋한 재회가 있다. 물론 알버트의 붕대는 잠시 뒤 진흙에 감춰진 조이의 특징(하얀 네 발과 이마의 무늬)을 증언하기 위해 예비 된 장치에 가까우며 알버트는 곧 조이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이의 눈을 떠올리며 이 장면의 감동을 조금 다르게 말해보고 싶다. 조이의 눈은 아름답지만 사실 그 자체로 투명하게 시선이 마주치는 장소는 될 수 없다. 이것은 스필버그의 유리창이 <우주전쟁>을 거치며 스스로에게 새긴 불가능성이다. 게다가 지금 알버트의 눈에는 붕대가 감겨있어, 비유의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둘의 마주보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보지 않고도 서로를 느낄 수 있는 우정이라는 수사에 기대기보다 다음과 같이 이 장면을 이해하고 싶다. 헤어진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때, 마주본다는 것은 우리 사이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뚫고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끌어안고서 가능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런 방해 없이 맞물리는 투명한 시선들이 없는, 아니 그것이 불가능한 순간에 우리는 <워 호스>에서 가장 커다란 우정의 감각을 만날 수 있다.


이제 스필버그는 <마이 리틀 자이언트>(2016)에 이르렀다. 흥행에서 실패하고 평단에게도 부당하게 무시당한 이 영화에는 우정과 모험, 꿈과 환상이라는 스필버그의 오랜 주제와 디지털로 그려진 영화 가능성의 탐구가 있다. 그 자체로 꿈을 지시하는 빛과 빛이 만드는 그림자, 거인의 둔탁한 말과 느릿하고도 민첩한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율동이 영화에 비상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영화를 만들고 보기에 대한 하나의 우화이기도 하다. 고아원의 외톨이 소녀 소피(루비 반힐)가 만나게 되는 거인 나라의 꼬마 거인(마크 라일런스)은 채집한 꿈으로 새로운 꿈을 만들고 그것을 인간들에게 불어넣어주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꼬마 거인이 불어넣은 꿈이 상영되는 장면은 특별히 인상적이다. 마음속 소리를 듣고 꿈을 불어넣어주러 소년의 집을 찾아간 꼬마 거인과 여기에 동행한 소피가 창문 밖에서 잠자는 소년을 보고 있다. 꿈의 내용이 궁금한 소피에게 꼬마 거인이 그것을 설명해주면 소년의 방은 작은 극장이 되고 꿈은 그림자 연극의 모습으로 상영된다. 꿈은 영화가 되고 그것을 보고 있는 거인과 소피의 표정은 함께 빛난다. 후반부에는 여왕에게 악몽을 불어넣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와 같이 꿈을 불어넣고 그것을 지켜보는 과정이 유리창이 없는, 창문이 열린 창틀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물론 <마이 리틀 자이언트>에는 여전히 꿈을 담는 유리병과 창문이 가득하고 거인의 돋보기와 소피의 안경도 있다. 그러나 꿈을 함께 보는 장면에서는 유리창이 없다. 때문에 꿈과 현실, 그러니까 영화와 현실은 보다 가깝게 느껴지고 사실상 구분이 불가능해진다. <스파이 브릿지>에서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보게 했던 스필버그는 이번에는 유리창 없이 우리가 직접 꿈꾸기를 원한다. 대신 유리창은 다른 곳에 있으며 이번에도 마주보기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꼬마 거인이 꿈을 찾아오는 여정을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거인 나라의 언덕을 오르고 올라 커다란 나무 앞에 다다르자 꼬마 거인은 소피를 나무 앞 호수로 안내한다. 소피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놀랍고 아름답다. 호수에는 나무가 비치고 있고 그 안에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것처럼 빛이 가득한 것이다. 곧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꼬마 거인이 호수에 뛰어들어 단번에 반대편 땅에 착지한다. 소피가 보고 있었던 것은 호수에 비친 나무가 아니라 호수 반대편 꿈의 세계의 나무였던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꼬마 거인과 소피가 호수를 경계로 마주보고 있다. 이 다른 세계는 꼬마 거인의 디지털 세계와 소피의 아날로그 세계처럼도 느껴진다. 이때 꼬마 거인이 말한다. “뛰어내려, 소피.”


호수에 뛰어드는 소피의 이 용감한 몸짓은 한 번 더 반복된다. 식인 거인들이 소피의 존재를 눈치 채자 꼬마 거인은 소피를 고아원에 데려다주고 사라지는데, 소피는 호수에서 거인이 했던 말 “뛰어내려, 소피.”를 작게 외치고는 난간 아래로 뛰어내린다. 아무리 작은 소리도 듣는다는 꼬마 거인은 뛰어내리는 소피를 받아주며 이에 응답한다. 소피는 뛰어내리는 몸짓으로 두 세계를 연결한다. 이 두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로 연결된다. 소피는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궁전의 한 방에서 일어난다. 어젯밤에 꿈을 꾸었다는 말로 시작하는 소피의 독백은 멀리서 걸어가는 꼬마 거인의 다리와 트럼펫, 그리고 더 멀리의 거인 나라를 보았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꼬마 거인은 자신의 세계에서 정원을 가꾸고 맛있는 스튜를 끓이며 글을 쓴다. 이제는 각자의 세계로 돌아갔지만 소피는 거인을 볼 수 있다. 유리창의 형상과도 같은 호수에 뛰어들었던 소피의 시선은 꼬마 거인의 세계에 닿고, 꼬마 거인은 그런 소피의 아침 인사를 듣는다. 창밖으로 꼬마 거인에게 아침인사를 건네는 소피와 자신의 집에 앉아 그 소리를 듣는 꼬마 거인의 얼굴로 이어지는 마지막 두 숏은 둘의 우정을 보여주는 근사한 마무리이다.


여전히 멈추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내는 스필버그의 행보에는 어딘지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예쁘고 아름다운 꿈들뿐 아니라 악몽도 꿈이기에, 그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꼬마 거인의 조금은 지쳐 보이기도 했던 얼굴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 좋은 것이나 나쁜 것, 건너편에 가닿는 사람들의 시선까지도 그 무엇이든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겨져 온 ‘영화’의 곁에 오랜 시간 함께했던 자의 깊은 고민과 운명이 그에게서 보인다. 그는 반대편의 상이 맺히는 유리창이 곧바로 시선의 투명한 매개로 여겨지는 문제에 대해 근심하고 경고하면서도, 시선이 맞닿고 관계가 시작되는 유리창과 같은 장소가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스필버그는 무수히 많은 유리창을 거쳐 다시 한 번 우정과 꿈의 아름다움 앞에 도착해있다.

만식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