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사건을 극화한 영화들은 대개 ‘실화에 기반함’이라는 표현으로 영화를 열고 실제의 사진이나 영상을 짤막하게 삽입하며 영화를 닫는다. 이는 영화의 성립 근거를 외부에서 찾아 증명하려는 시도이거나 ‘사실에 기반한’ 감흥을 풍부하게 하려는 시도이겠지만 이 선택이 주는 효과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본편과 사실적 에필로그가 병치될 때, 대개는 에필로그가 영화에 붙은 주석처럼 여겨지게 마련이지만 애초에 노렸던 바로 그 ‘실화’가 가진 모종의 힘이 영화 전체를 주석처럼 느껴지게 만들기도 한다. 혹은 본편과 에필로그는 매끈하게 달라붙지 않고 이질적인 서로의 세계의 편에서 긴장한다. 우리가 쉽게 가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사실의 세계와 그것이 굴절되고 반사되어 이해하기 쉽게 다듬어진 이야기의 세계가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은밀하게 겨루고 있는 것이다.


80년의 광주를 카메라에 담은 한 기자와 그를 태운 택시운전사의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영화 <택시운전사> 역시 에필로그에 이르러 하나의 영상을 삽입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2015년에 남긴 영상으로, 1980년 5월 광주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던 택시운전사 ‘김사복’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이다. 나의 친구, 당신을 너무나 만나고 싶다고 힘겹게 단어들을 내뱉으며 울먹이는 힌츠페터의 이 영상은, 이들이 겪었던 광주에서의 시간을 극화한 영화 뒤에 덧붙여져 특히나 더 큰 울림을 남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짧은 영상에는 어딘지 그러한 감동적인 맥락을 거부하는 단호함이 있다. 각자의 궤도를 떠돌다가 ‘광주’라는 공간에서 단 한번, 단 한번 마주치고 단 한번 동행한 이후 말 그대로 죽을 때 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의 관계가 카메라를 앞에 두고 앉은 나이든 힌츠페터의 몇 마디 말에 새겨져있다. 상대방에게 가닿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발신, 그러나 이 불가능을 끌어안은 멀고도 먼 거리에야말로 우리가 우정이라고 간신히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 우리에게 때로 너무나 쉽게 ‘우정’으로 번역되어버리는 익숙한 이미지들과 감동적인 접촉, 그럴듯한 수사들이 아니라, 결코 화해되거나 제거되지 않을 세계의 얼룩들, 개인의 존재와 관계들이 가진 어쩔 수 없는 긴장들이 새겨진 감각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우정의 조건이라면 말이다.


<택시운전사>는 우리로서는 이름도 얼굴도 정확히 모르는 인물인 ‘김사복’을 김만섭(송강호)이라는 캐릭터로 제시하고 있다. 역사와 사연이 부여된 이 인물은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나 광주와의 거리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설명과 사연을 짊어지고 있기도 하다. 아내와 사별하고 개인택시를 몰며 어린 딸과 월세방에서 살아가는 만섭은 서울시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데모의 현장들을 장애물로 여기며 많은 돈을 벌어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꿈인 인물이다. 밀린 월세 10만원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그가 택시에 태운 기자 ‘피터’는 남한의 정치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듣고 입국해있는 상황이다. 사우디에서 5년간 일했다는 만섭이 짤막한 영어를 할 수 있기에 이들의 대화가 간신히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오해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단지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서, 영화에서 제시된 적당히 무지한 소시민의 이미지에 충실한 만섭과 엘리트 외신기자인 피터 사이의 거리는 서울과 광주의 거리만큼 멀어 보인다. “데모하려고 대학갔나, 열심히만 살면 한국처럼 살기 좋은 나라가 어디에 있다고...”라는 이제는 다소 식상해진 대사를 굳이 삽입하면서, 영화는 만섭의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와 피터의 거리, 또한 광주와의 거리를 노골적으로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 거리를 대하는 방식이다. 광주에 도착하자 광주 시민들과 택시기사들은 광주를 찍으러 온 피터에게는 친절하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약간의 소동을 겪은 만섭에게는 적대적이다. 통금 전에 서울로 돌아갈 수 없어져 낙담하는 만섭은 피터와 다투게 되는데 이들은 곧 전라도 밥상을 앞에 두고 화해하게 된다. 매운 갓김치를 먹고 곤혹스러워하거나 구멍 난 양말을 신은 피터의 모습이 만섭을 비롯한 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우정이 이들 사이에 쌓여간다. 혹은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두 사람이 함께 겪어가는 광주에서의 일련의 사건들이 있고, 그것이 그들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식이다. 그러니까 둘 사이의 격차, 혹은 광주와 그 외부와의 격차들은 좁힐 수 없을 것처럼 멀게 제시된 후 단숨에 메워지는데, 기쁘고 슬픈 일을 함께 겪고 우리네 삶이 다 비슷하며 그래서 결국 차이를 압도하는 보편적인 우정의 감정이 그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 이들이 향해가는 결말이라면 그것을 너무나 안일하고 기만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섭과 피터, 혹은 광주와 외부의 격차가 그 격차를 드러내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격차는 사실 중요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정’에 의지해 서로를 연결시킬 때, 영화는 또 하나의 차이를 함께 제거한다. <택시운전사>는 중요한 두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데, 하나는 애국가를 틀어놓고 시민들을 향해 군인들이 무차별 사격을 하는 장면이고 또 다른 하나는 후반부 ‘카체이싱’장면의 마지막 충돌을 향해 후진하는 태술(유해진)의 충돌장면이다. 두 장면만 놓고 본다면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혹은 ‘볼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숙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동일한 영화 내에서 계엄군이 광주시내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스펙타클을 위해 사용되고 총탄에 손상되는 육체가 슬로우모션으로 제시될 때, 과연 이 두 태도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 차이를 생각하는 것이 <택시운전사>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리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는 지점에서, 과연 우리에게도 그러한가, 우리에게도 차이는 중요하지 않고 그 사이를 채울 수 있는 ‘인간적인’ 정, 부정한 사회에 대한 분노만 있으면 되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아직 광주란 격차 너머에 남아있는 시간이며 차분히 정제된 언어로 추모할 수 없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라고 상상되는 감정과 사연을 부여하여 과거를 박제하지 않고, 그때 그 시절, 우리네 엇비슷한 삶을 살았다는 한 소시민의 사연을 경유하지 않고, 그래서 상상된 거리좁힘을 통하지 않고 현대사의 격동을 영화에 불러올 수 있을까. 역사가 끊임없이 현재의 우리를 덮치게 할 수 있을까. 끝내는 2003년의 나이든 만섭이 신문에 인쇄된 피터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마저 담아낸 영화의 마지막을 보며 아쉬움을 느끼던 찰나에 영화 전체를 압도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을 마주했다. 카메라 앞에 앉은 사람과 그 영상이 간절히 가닿기를 바라는 이름 모를 대상으로서의 어느 친구. 그 아득히 멀고 먼 거리를 생각하면서, 나는 갓김치의 추억과 최루탄의 매캐함과 긴박함과 눈물이 없는 우정, 극화되지 않은 우정, ‘인간적’이지 않은 우정, 그러니까 우리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우정의 감각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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