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이 올라가게 될 2017년 3월 6일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진단받은 황유미씨가 사망한지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황유미씨의 사망으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단체인 반올림이 결성되었고 반올림은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을 거부하고 문제해결을 기피하는 삼성에 맞서 지금까지 투쟁하고 있다. 영화 <탐욕의 제국>은 2012년 제작된 다큐멘터리로 삼성반도체 공장의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은 난감함에 가깝다. 물론 사회적 문제와 그렇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나눌 수 있다고는 믿지 않지만 세상에는 분명히 ‘사회적 이슈’라는 것이 있고 영상 미디어는 그것을 널리 알리는데 가장 적합한 매체다. 극영화건 다큐멘터리이건 이 널리 알린다는 대의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그 자신이 사건 전달의 투명한 매개가 되고자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사실은 결코 투명한 매개가 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짧은 신문기사조차도 현실의 사건을 투명하게 보도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전달’이란 모두 구체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이다. 현실의 사건에 분노하고 마음 졸이면서도 한 편의 ‘영화’가 여기에 도착했다는 것에 반가움과 함께 종종 난감함이 고개를 든다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의제와 영화의 실천 사이에서 입장을 정해야 하는 것이 난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도착한 것이 영화이므로, 우리는 영화의 방법을 말해야 할 것이다.


<탐욕의 제국>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퇴사 후 발병했거나 혹은 발병으로 인해 퇴사 후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는 노동자들을 근거리에서 찍은 영화다. 여기에는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인 황상기씨나 노무사 이종란씨, 산업재해 피해 가족들의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그 중 이윤정씨는 반도체 칩을 고온에서 검사하는 일을 했는데, 퇴사 후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영화의 초반부 그녀는 병원을 드나들며 검사 일정을 확인하고 카메라를 향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병은 점점 진행되고 그녀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끝내 영화가 끝나기 전에 사망한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얼굴이 점점 부어 눈을 뜰 수 없지만 몸의 감각은 살아있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흐릿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이윤정씨의 모습이 영화에는 잠시 등장한다. 오랜만에 그녀를 보러 사람들이 왔고, 그들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눈앞의 사람들을 보길 원한다. 남편은 안경을 씌워주기도 하고 눈에 손을 대어 앞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이때 영화는 갑자기 흐릿한 한 숏을 삽입하는데, 이것의 위치는 다름 아닌 이윤정씨의 시점숏이다. 재현할 수 없는 시선을 재현했으므로 이 방법은 잘못된 것인가? 물론 이 ‘시점숏’이 등장하자마자 영화를 보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느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영화에 사람들이 응당 기대하는 투명함 대신 그것에 육체적인 방법으로 저항하며 영화가 끌어안은 불투명함이 있다.


삼성이나 자본의 횡포라는 말은 얼핏 아주 가깝게 느껴지지만 매우 추상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는 단어이다. 그러나 반도체공장에서 일했고 그로 인해 병을 앓는 피해자들의 육체는 아주 구체적인 것이다. 삼성반도체 공장의 산업재해는 공장에서 사용하는 유독한 물질들이 노동자들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문제다. 여기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생리불순이나 불임과 같은 문제들에 직면해있고 백혈병, 유방암, 뇌종양과 같은 병이 노동자 개개인의 육체에 달라붙어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병세가 악화됨에 따라 잘 걷지도, 잘 보지도, 잘 듣지도, 잘 말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이상하게 어긋나있다. 거리의 농성 장면에는 종종 사람들의 발언대신 거의 지독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이상한 소음이 삽입되어있다. 이것은 우리가 흐릿한 자료사진으로밖에 대면할 수 없는 공장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느껴진다. 혹은 노동자들이 생활하던 기숙사의 겉모습은 영화 전반에 걸쳐 몇 번 제시되지만 점점 안개가 짙어지는 것처럼 불투명함에 휩싸이고 그 위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떠돈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시점숏’까지 더해지면 나는 이 영화가 ‘신체화’ 되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는 감각의 충만함이 아니라, 분리되고 소멸되는 상처 입은 육체의 영화적 재현을 향한다.


다시 ‘시점숏’으로 돌아가보자. 이론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무언가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있으며 하필 재현하고자 하는 시선은 흐릿하게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의 것이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이윤정씨의 시선을 찍고자 노력하는 영화에 속수무책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내게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 것 같다. 찍었으나 찍히지 않은 시선, 그것은 우리가 결코 투명하게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아득한 장막이다. 우리가 그 시선을 보는 순간, 사실은 결코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를 보는 우리가 세계의 불행과 고통에 곧바로 직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 장막은 ‘탐욕의 제국’ 안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현실을 동시에 지칭한다. 멀리서 찍힌 기숙사의 모습, 흐릿하고 표백된 자료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공장 내부의 풍경들은 내레이션에 잠시 등장하는 것처럼 노동자들이 꾸곤 했다는 꿈을 재현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문제의 간결한 실체와 논리적인 귀결을 제시하는 대신, 이 영화는 만질 수 없는 육체를 만지며 ‘탐욕의 제국’앞에 무력하게 서있는 사람들의 자리에 함께 서있기를 택한다. 내게 이 결단은 영화가 그렇게 한 것처럼 나 역시도 힘껏 끌어안고 싶은 ‘영화의 방법’이다.


(이상하게도 제목을 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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