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고 힘들어서 넋두리 겸 본 영화들에 대한 코멘트. 긴 글로 발전될만한 것들도 있고 그냥 감상만 남길 것들도 있고.


2017년은 프리츠 랑의 <빅 히트>로 시작했다. 폭력을 다룬다는 것, 꽉 짜여진 경제적 숏의 운용 속에서도 폭력에 대한 반응들이 풍요롭게 흘러넘친다. 


무르나우의 <선라이즈>. 영화가 나를 덮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슬프고 아름답고 동시에 너무나 위험하고 기괴하다. 사진관 앞에서 사진을 확인하는 부부의 모습은 당분간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혹은 비밀이 너무 많은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부산에서 보고 1년반쯤 지나 다시 보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점점 더 이 영화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블로그의 배경 사진이기도 한 영화이다. 소년 장첸의 데뷔작이며 대만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에드워드 양의 대표작이고 4시간여의 상영시간을 가진 영화다. 덥고 폭력적이며 예민한 길거리를 가로지르는 자전거, 남매들, 급우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와 팝송, 엘비스 프레슬리. 끝날 것 같지 않은 카메라의 움직임, 유령처럼 떠도는 목소리, 어둠을 밝히지만 가녀린 불빛들. 예민한 폭력의 시대 속에서, 어떤 등장인물도 등한시하지 않는 영화의 선택이 아주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보고싶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아녜스 바르다의 21세기 다큐멘터리로 이삭을 줍는다는 행위에서 시작해 줍는 행위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어쩌면 영화를 만드는 자신의 행위 역시 줍는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만든 영화다. 그러나 그런 설명보다는, 상품가치가 없는 감자를 줍는 사람들 속에서 하트모양의 감자를 주워 기뻐하는 바르다의 모습이나 함께 오랜시간 일해온 음악감독이 버려진 물건들을 둘러보는 와중에 줍지 않았던, 시계침이 없는 탁상시계를 주워와서 시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 좋다고 말하는 장면들로 이 영화는 기억된다. 마음을 영화로 찍을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바르다가 보고 싶어했던 이삭줍는 그림을 지하실에서 바깥으로 꺼내오자 거기에는 문득 바람이 분다. 


<인히어런트 바이스>와 <위 오운 더 나잇>.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문득 다음날 이 두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았다. 와킨 피닉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이기도 했고 미국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이기도 했다. 내게 폴 토마스 앤더슨, 베넷 밀러, 코엔 형제, 제임스 그레이 정도의 미국 감독들은, 아 타란티노를 포함해서, 활동을 시작한 시기에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현재 미국영화를 말하는데 비슷하게 사고되는 감독들이라는 일종의 선입견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폴 토마스 앤더슨과 베넷 밀러를 특히 좋아한다. 유독 내가 힘겨워했던 감독은 제임스 그레이인데, <위 오운 더 나잇>을 보고 완전히 반했다. 물론 <이민자>를 다시 보기까지는 조금 용기가 필요할 것 같지만, 일단 그의 신작 <잃어버린 도시Z>를 매우 기대하게 되었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내게 너무나도 슬픈 영화였다. 그 안에 푹 빠져서 하루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 닐 영의 노래를 며칠간 들었다.


<옛날 옛적 서부에서>. 하여간 정말 정말 정말 재밌었다. 


<까마귀 기르기>의 안나 토렌트는 정말 정말 정말 예뻤다. 노래 따라부르는 장면만 몇 번을 봤는지 모른다.


<윌로씨의 휴가>와 <트래픽>을 이어서 보았다. 그 전에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플레이타임>을 보았다. 타티의 그리 많지 않은 영화들 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은 영화를 보았기에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플레이타임>이 그의 걸작이자 야심작이라면 <윌로씨의 휴가>는 가장 아름다운 영화일 것이고 <트래픽>은 가장 슬픈 영화일 것이다. 만약 내가 글을 쓴다면, 사실은 <플레이타임>이나 특히 <윌로씨의 휴가>가 훨씬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트래픽>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소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이 영화는 <플레이타임>의 어마어마한 실패 이후 만들어진 영화인데, 산업사회 등 현대의 문제점들에 대한 그의 한층 성숙하고 비판적인 시각이 드러나는 영화라는 평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아마도 채플린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의 영화에 대해 말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하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자동차. <트래픽>에는 이상할 정도로 고장난 자동차가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윌로씨의 휴가>에서 연신 이상한 소리를 내는 그런 고장이 아니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찌그러진 폐차들. 이것이 어떻게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일 수 있을까. 자동차-그 무심하게 움직이는, 활력 넘치는 운동으로서의 사물에 대한 타티의 긍정을 기억한다면, 타티에게 자동차는 곧 사람이며 사람은 곧 자동차이다. 그는 지금 고장나버린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자동차. 이 영화는 타티의 가장 슬픈 영화이다.


<우주전쟁>.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영화관람을 끝마쳤다. 2월에 본 (아직 10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최고의 영화는 <우주전쟁>이다. 두번쨰 관람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영화에 압도되어서 보았고, 마음속으로 스필버그를 계속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긴 글로 발전시키고 싶은 생각. 스필버그에게 유리(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반사와 투시가 동시에 일어나는 그것. 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넘치는 이 영화는 정말이지 포스트 9.11 시대의 걸작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수식어를 찾을 수가 없다. 


<향기어린 악몽>은 기괴하게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다만 이것을 보고나서 굉장한 우울감에 허덕였는데, 내게 영화란 너무 거대하고 괴롭고 두려운 것이라는 것을 다시 실감했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이 너무 괴롭고 두렵다. 거기에 절대 가닿을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왜 영화를 보는 것일까. 


<매기스 플랜>은 정말 재밌었다. 피클맨이 너무 좋다.


일부러 미뤄두었다. <컨택트>는 정말 별로였다. 어떤 경우에도 원작 소설에 대한 애정이 영화관람에 개입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같은 소설을 읽은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도대체 그 소설에서 무엇을 보았냐고 감독에게 묻고 싶었다. 통상적으로 플래쉬백은 현재의 구멍을 메우는 용도로 사용되어 지극히 기능적으로 운용된다. 그것이 아무리 큰 반전을 담보하고 있어도, 혹은 기술적으로 아무리 매혹적으로 찍혀있어도 이것이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플래쉬백은 결코 시간을 찍는것이 아니다. 하물며 이 영화는, 지금 시간성에 대해 묻고 있는 영화가 아닌가? 헵타포드의 방식은 시간을 동시적으로 인식하고 우주물리를 목적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영화에서의 설명만을 참고하더라도, 루이스가 헵타포드의 방식으로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서) 시간을 인지한다면 그것은 선형적인 시간의 미래를 예지의 방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동시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된다. 중간에 제레미 레너가 열심히 설명해주잖아?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단순히 플래쉬백을 플래쉬포워드로 바꾼다? 이건 그냥 기만이다. 지금 영화는 헵타포드의 방식으로 시간을 감각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영화 내내 제시된 플래쉬백을 가장한 플래쉬포워드는 언젠가 짜맞춰지길 기다리는 시간의 조각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맞춰지는 순간 영화는 안온하게 끝난다. 관객들은 안전하게 이 맞춰진 퍼즐 조각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너무 실망한 나머지 나는 이 내용의 홍상수적 리메이크를 기대했다. 시간의 문제. 그것을 영화에서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적어도 어떤 영화들은 그것을 고민하다가 실패의 길로 나아간다. 그런 영화들이 <컨택트>보다 훨씬 더 좋은 영화들일 것이다. 


남은 2월은 개봉 영화들을 좀 챙겨봐야 할텐데. <사랑의 시대> <퍼스널 쇼퍼>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문라이트> <헥소 고지> <러빙> 등등이 기대작이다. 


어서 3월이 되어 <로건>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모두 로건 트레일러 보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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