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이 없는 원형의 길 위에서 두 사람이 만난다. 다르게 흐르던 둘의 시간은 어쩐 일인지 겹쳐져 항상 거기에 있던 것처럼 보이고,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앞에 서있다. 사람의 형체가 흐릿하여 분간이 어렵다는 황혼의 시간. 서로의 바뀐 몸으로밖에 만날 수 없었던 이들은 비로소 자신의 모습으로 상대방을 마주한다. 다시는 잊어서는 안되므로, 이들은 서로의 손바닥에 이름을 써주려 한다. 그러나 황혼의 시간은 찰나이고 이름은 적히지 못하며 두 사람은 다시 헤어진다. 그렇게 무언가를 잊은 채로 미츠하와 타키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걸었을 거리를 걷고 또 걸으며 살아간다. 언젠가 다시 우연히 만나 서로의 이름을 물어볼 수 있을 때까지.


영화 <너의 이름은.>은 꿈속에서 몸이 바뀌는 두 남녀의 로맨스와 그 사이에 운명처럼 떨어진 혜성의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과 기억의 속성이다. 도시의 남학생 타키와 시골의 여학생 미츠하. 두 사람은 어느 날 부터인가 꿈속에서 서로의 몸이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몇 가지의 규칙들을 만들어가며 그 생활에 적응해나간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호감이 되어갈 무렵 그 현상은 중단되고 타키가 찾아낸 진실은 가혹한 것이었다. 둘 사이에는 3년이라는 시간의 어긋남이 있었고 미츠하는 혜성의 파편이 만들어낸 재난으로 이미 사망했다는 것. 타키는 꿈속에서 가본 적이 있던 미츠하 집안의 사당으로 가 다시 한 번의 뒤바뀜을 만들어낸다. 이제부터는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황혼의 시간이 끝나면 두 사람의 기억은 점차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시간으로 돌아가면 기억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리라는 것을 이들은 예감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의 시간과 기억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너의 이름은.>과 종종 비교되는 영화 중에는 호소다 마모루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있다. 두 영화 모두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미래로의 이어짐, 즉 시간의 연속성을 말한다면, <너의 이름은.>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시간의 중첩성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마코토는 종종 시간의 이전으로 돌아와 사소한 행동들로 미래를 조금씩 변화시키지만 결국 마코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간들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며 거기에는 치아키가 기다리고 있을 미래가 있다. 마코토는 치아키가 보길 원했던 그림을 미래에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지키는 일을 하려고 한다. 이때의 기억은 꼼꼼히 채워지길 기다리는 시간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의 시간은 어딘지 고여있다는 인상을 준다.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뭉쳐지고 겹쳐지고 미래로 이어지지 않는, 아니 미래로 이어지기를 주저하는 세계. 미츠하와 타키가 만났던 분화구 위의 길은 원형으로 이어져있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시간은 마치 항상 겹쳐져 있었다는 듯이 문득 만난다. 공간 위에 시간이 겹쳐져 쌓이고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묶여있는 세상에서, 기억한다는 행위는 결코 비워진 조각을 채우는 것으로 완성될 수 없다. 이때의 기억이란 차라리 그 모든 겹쳐짐을 느끼는, 그러니까 시간을 재감각하는 것이 된다. 보았다시피 두 사람의 ‘기억한다’는 행위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결코 완수되지 못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우연히 만나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면서 영화가 끝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만약 시간을 재감각하는 것이 기억이라면, 겹쳐진 시간 속에서 서로를 느꼈던 두 사람은 어쩌면 그때부터 줄곧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잃은 것 같은 상실 속에서, 사람들이 수없이 걸었을 거리 위에서 쌓이고 고여 있는 시간을 직접 앓아가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기를 끊임없이 주문하고 있다. 혹은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그들이 기억하지 못한 것은 단지 서로의 이름뿐이다.


거대하고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시간에 앞,뒤가 있으며 시간이 그리고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것을 의심 없이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 희망과 위로가 있으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시간들은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한데 뭉쳐져 있거나 거리 위에 겹쳐져서 쌓인다. <너의 이름은.>은 결국 타키가 미츠하의 세계를 구해 수백명이 죽었던 인명피해의 내용을 바꾸고 그 수많은 죽음을 없었던 일로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만, 클라이막스에서는 운명이나 미래라는 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시계침도 곁눈질을 하며 지나가버리는 세상에서 사랑을 하자는 내용의 노래가 울려퍼진다. 시간에는 앞,뒤가 없으며 모든 시간들은 지금 현재만을 가진 채 계속해서 쌓여간다. 거기 겹쳐진 시간에서 너와 나는 연결되고, 이들의 ‘기억한다’는 행위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돌파해버린다. 미래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고 둘의 사랑만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이것은 비극 이후의 세계를 대하는 가장 직설적이고 솔직한 방법이다.


직설적이고 솔직한 것은 때로 퇴행적으로 보인다. 모두가 비극 이후를 말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비극 이후를 감지하는 또 다른 ‘감각’의 문제로 돌아간다. 무언가 더 나은 세계를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충분히 나이브하게 보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내게 <너의 이름은.>은 오로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중요하게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영화이다. 의도적으로 영화의 디테일을 하나도 훑지 않은 것 역시 그런 판단 때문이었다. 타키가 진실을 마주하기 직전까지도 재난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거나 몸이 바뀌는 와중에 서로가 속한 시간축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한 비판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동일한 세계를 살아간다는 사실이 아니라 단지 서로간의 연결일 뿐이며 그럴 때 가능한 기억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미츠하가 속해있음을 알아차렸을 때에야 재난은 타키의 세계에 틈입해 들어온다. 미츠하를 구해야 할 순간이 왔을 때에만 서로의 시간축이 다르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 된다. 서로 다른 시간의 겹쳐짐 속에서 서로는 ‘동시적’으로 접속되어 있고 기억이란 그것을 온몸으로 감각함으로써만 가능한 행위이다. 기억은 과거의 빈칸을 채우는 행위도, 특정 사건을 매번 복기하는 행위도 아니고, 기억은 시간이 직선처럼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심하는데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불안한 행위이다. 기억이란 시간의 규칙을 배반하는 일이다. 강박적으로 주문처럼 되뇌는 기억해야 한다, 기억한다는 말들의 맨몸을 보기를 마침내 요청하고야 말았다는 점에서 <너의 이름은.>은 내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영화 중 하나이다.


그러니 수많은 비난을 받았던 이 영화의 퇴행적이고 보수적인 젠더 이미지에 대해서도 이 맥락 속에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미츠하의 몸 속에 들어간 타키는 매번 미츠하의 가슴을 만져대고, 타키의 몸 속에 들어간 미츠하의 ‘여성스러운’ 모습은 매번 코믹의 요소로 사용된다. 다리를 오므리고 앉거나 타키의 몸을 부끄러워하는 것 등이 그렇다. 두 사람이 정한 수칙도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미츠하가 정해준 수칙은 대부분 몸을 만지거나 씻지 말 것, 치마와 남자들의 시선을 주의할 것으로 보여지지만 타키의 경우 아르바이트에 지각하지 말고 용돈을 낭비하지 말 것으로 보여진다. 서로의 몸 속에 들어가서도 보수적으로 전형적인 ‘남성성’, ‘여성성’의 모습으로 행동한다는 점은, 인간의 외면이나 형태는 상관없이 내면에 진정한 성별적 핵이 있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도시의 남학생과 시골의 여학생이라는 구도, 미츠하가 지켜야 할 것이 마을의 전통인 점, 결국 지켜져야 할 쪽이 미츠하인 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남녀의 성애적 결합을 유일한 형태의 사랑으로 여기는 관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매우 게으른 습관이라는 점에서, 21세기의 관객인 우리가 이것을 비판하는 일은 모두 온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쩌면, 이 영화의 근간을 떠받치고 있는 시간과 기억의 행위에 대한 아이디어가 이러한 퇴행적 이미지들로 영화를 가득 채우도록 추동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차피 나아가지 않을 세계라면, 나만이 속해있고 나만이 알고 있었던 세상의 이미지, 관념들을 터질 듯이 채워서 그 시간을 무한히 겹쳐지게 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영화 관람 이후 여기저기에서 올라오는 폭력적 이미지에 대한 ‘상처 입은’ 후기들은 모두 읽기도 전에 몸이 아파오는 것들이었다.


완성된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장점 몇 가지와 단점 몇 가지를 나열하는 것은 그 영화에 대해 말하는 가장 쉬운 방법인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방법임을 알고 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려면 그 장점들과 단점들이 어떻게 얽혀있는지 말하고, 사실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의 근거가 되지 않았는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너의 이름은.>이 보여준 세계에 대한 감각은 매우 직설적이고 솔직하기 때문에 비극 이후를 사는 우리들에게 가능한 가장 윤리적인 차원의 재감각에 대한 활로를 열어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세계의 가장 고여 있고 폭력적인 부분들을 재현함으로써만 가능했다. 혹은 두 측면은 모두 한 영화에 의해서만 포착 가능했다. 이 영화는 시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느끼기를 원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요동치는 세계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 이것을 이해하고 정당하게 비판하는 일, 그것이 한 편의 탁월하고 문제적인 영화를 대하는 우리에게 부과된 과제이다. 


조금의 감동이라도 더 느낀 쪽이 더 많이 용기내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건 내게,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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