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얼마 전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강간 장면 연출이 논란의 대상이 된 일이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2013년 인터뷰에서, 해당 장면에서 버터를 사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 마리아 슈나이더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촬영을 시작했고 감독과 상대배우인 말론 브란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화제가 되지 않았던 이 발언은 최근 여성 성폭력에 대한 캠페인을 통해 다시 화제가 되었고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저마다 주목하는 바가 달랐으나 중요한 것은 베르톨루치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사실이다. “마리아가 분노와 수치심을 연기하기보단, (직접) 느끼길 원했다.” 실제로 마리아 슈나이더는 수치심을 느꼈고 또한 강간당하는 기분이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이야기된 다른 장면들도 있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의 키스신 역시 배우 김새벽에게 사전 통보되지 않은 장면이었다. 수많은 영화들이 날것 그대로의 반응을 담고 싶다는 이유로 기습적인 키스, 강간 장면 등을 여성배우와 사전에 조율하지 않는다. 이때 관객은 실제로 행해지는 성폭력적인 장면을 보는 것이다. 때문에 현실의 언어로 여기에 제동을 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상대적으로 발언권을 비롯 여러 가지 권리를 가지기 힘든 여성배우의 여건을 고려하고, 어떤 핑계로도 한 인간의 존엄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이 말은 위태롭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냉정하게 말해보자. 이것은 현실의 언어이지 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결코 될 수 없다. 우리는 한 가지를 더 말해야 한다.


2.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부부가 가족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는 것, 남성은 밖에서 일하고 여성은 집안일을 맡는다는 것, 혹은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 이런 주장의 근거는 간단하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과 진지하게 싸우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성된 특정한 형태의 규범이다. 말하자면 ‘본성’은 현재를 지탱하기 위해 거꾸로 부여된 지위인 셈이다. 그러나 이 말로는 부족하다. 끊임없이 본성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구성되지 않은’, ‘순수한’ 본성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이런 말들이 근본적으로는 ‘본성’의 지위를 유지시키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그러니 우리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본성’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현실의 규범을 유지시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인간의 본성이 가지는 지위를 끌어내리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설령 본성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것은 결함으로 받아들여지고 저지되고 공동체의 통제 아래에서 사고되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로 무해하고 중립적이지 않다. ‘원래 그렇기 때문’에 허용되는 것은 없다.


3. 그러니 어쩌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를 찍으려는 욕망은 영화에 내재한 특성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를 보는 이들의 욕망과 공명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강간 장면 연출에는 분노하면서도, 특정한 장면을 보면서 그 장면의 표정이 연기가 아니라 실제의 표정이라는 영화 바깥의 정보를 근거로 들며 환호하겠는가. 영화가 욕망하는 실제가 우리의 현실일 때, 영화는 위험한 매체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그대로 둔 채로, 어떤 위대한 영화를 찍더라도 현실의 인간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내게 어딘가 겉도는 말처럼 들린다. 영화는 ‘그런’ 예술이고, 그러나 동시에 ‘그런 것’은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도, ‘위대한’ 것일 수도 없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말. 그러나 진실을 드러내는 거짓말이다. 우리에겐 형식의 위대함이란 명제가 있다. <배우 수업>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 개개인의 체험이나 심리적 경험에 기초한 연기 지도를 강조했으나 그 반대편에는 배우의 신체 표현에 주목했던 메이예르홀트가 있었다. 예이젠슈타인은 여기에서 예술 언어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연기는 배우가 몸으로 행하는 예술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실제를 착취하고 싶어하며 관객은 현실과 극의 경계가 흐려지는(것처럼 보이는) 지점들을 외설적으로 욕망하지만, 그것이 ‘좋은 예술’, ‘위대한 예술’의 근거는 아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특성을 보다 직설적으로 인지하되, 그것을 현실 속에 놓인 영화가 지닌 취약성으로 위치시키고 더 많은 ‘비평’의 언어를 말해야 한다.


4. 나는 결국 이러한 고민들이 ‘우리의 목적은 정전을 만드는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미학적인 명제들을 세워놓고 거기에 부합하는 영화사 최고의 정전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인가? 그러나 그 명제들은 끊임없이 흔들릴 것이며,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어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정전을 만들어야 하는가? 아니, 세상에 정전이란 존재하는가. 물론 어떤 리스트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영감과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것을 정전의 특징이라고 말하기엔 정전이라는 단어가 그 영화들의 활력을 누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전의 목록을 만드는 대신 그 자리를 끊임없는 사유로 채우고, 예술의 언어가 현실의 윤리에 겹쳐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 과문한 나에겐 그것이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우리가 나아갈 길처럼 보인다.


5.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가. 그것은 동료시민인 여성에 대한 윤리의식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는 기사를 보았다. 내게 이 말은, 아무리 위대한 영화를 만들더라도 현실의 인간을 착취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식의 오류를 범하는 말처럼 들렸다. 위대한 영화라는 명제를 새로 정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와 무관하게 현실의 윤리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위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남성의 자리를 질문하지 않고, 동료시민에 대한 윤리의식만으로 페미니즘이 정말 ‘필요’한가? 오히려 지금의 세계에서 누군가에겐 명백히 필요하지 않은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끝없이 정체성을 물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며 그 자신도 끝없이 파열되고 재정의 될 운명을 타고난 이론이자 실천이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다시, 보게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자 기쁨이 아닌가. 세계를 다시 본다는 것. 잠들다시피 멈춰있는 정전을 흔들어 깨우고 세계를 다시 보라고 주문하며 변화하는 세상을 끝없이 받아들여 그 스스로도 균열의 대상이 되는 것. 여기에 뛰어들고 싶다면 당신에게 페미니즘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된다.


2017년을 앞두고 검증할 길 없는 두서없는 생각들을 잡문의 형식으로 풀었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 일종의 다짐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영화, 그 거짓말을 꿈꾸며. 나는 멀리까지 가보고 싶다.

만식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