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사막을 달려 마침내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와 부발리니 전사들이 만난다. 녹색의 기억, ‘어머니들의 땅’을 찾아 달려왔지만 그 땅 역시 버려진 늪지대, 황량한 사막의 일부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해가 지고 맥스와 브리더들이 함께인 퓨리오사 일행과 부발리니 전사들은 함께 밤을 맞는다. 촘촘히 빛나는 별들과 지구 주위를 돌며 빛을 내는 인공위성을 보며 그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때 맥스(톰 하디)는 작은 천 조각에 지도를 그린다. 고정점이 별로 없는 사막에서 시타델과 협곡, 늪지대와 몇 개의 지형으로 이루어진 이 지도를 보여주며 맥스는 다시 시타델로 돌아가자고 제안할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과 같은 맥스의 뒷모습을 시작으로 이들의 경로는 반으로 접혀 되돌려진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지도는 아주 간단히 그려진다. 전투차량을 몰고 시타델로부터 가스타운으로 이어지던 경로에서 이탈하여 협곡을 지나 동쪽으로 계속 달리던 일행이 다시 협곡을 지나 시타델로 돌아오는 여정. 이 뚜렷한 경로를 지도위에 그렸던 맥스는 그러나 지도의 일부가 되지 못한 채 다시 길을 떠난다. 퓨리오사가 다시 돌아온 세계에 애초부터 이방인이었던 맥스의 자리가 없음은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이지만 어쩐지 나는 맥스가 지도를 그린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지도 안에 지도를 그린 자의 자리는 없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그릴 수 없는 지도에 관한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개봉 당시의 들뜬 마음을 다시 기억하며 이번에 새로 개봉한 이 영화의 흑백 버전을 보고 왔다. 찾아보니 첫 개봉은 2015년 5월이다. 두 영화를 보았던 기간 사이에 약 1년 반 정도의 공백이 있는 셈이다. 이 글은 아마도 처음의 들뜬 마음에 대한 고백도, 성숙해진 (물론 성숙해졌달 것도 없다)새로운 감상도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1년 반 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던 고민에서 시작해 다시 그곳에서 끝을 맺는 아주 개인적인 글을 써보고 싶다. 두 영화 관람 사이에 놓여있는 또 다른 영화 관람이 이 글을 쓰게 했는데, 그 영화는 서부극의 영원한 정전으로 불리는 존 포드의 <역마차>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개봉 당시 많은 이들을 열광케 했으며 내 주변 사람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영화에 말을 보탰다. 이 영화는 그만큼 강력했고 그만큼 말하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영화였던 셈이다. 영화의 액션 장면들이 간직한 터질듯한 활력, 서부극에의 향수,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전제하는 망해버린 세상, 변화하는 세계를 반영하는 듯한 여성들의 이야기 등 흘러넘치는 모든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자신의 언어로 다시 해석하게 했다. 당시의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존 포드의 <수색자>로 서부극을 처음 접했던, 영화사를 완전히 뒤죽박죽 정신없이 쫓아가고 있던 시기답게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땅이 모든 이야기와 모순을 가득 품었다고 말하며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믿었다). 여기에선 이정도만 말해두자. 그러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 대한 각자의 ‘해석’은, 동시에 저마다 실패했다고.


<역마차>를 처음 본 시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두 번째 본 날의 경험은 아주 생생하다. 흔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간결하게 정돈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대부분의 고전 영화를 대하는 태도 역시 비슷할 것이다. 꼬임 없는 플롯, 뚜렷한 목표의 추구 등 고전이라 불리는 영화들은 어딘지 순진한 구석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동시에 그러한 직선의 진행이 강력한 영화적 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본 <역마차>는 어딘지 이상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세세한 부분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줄거리에는 절대 포섭될 수 없는 것으로, 위태롭기까지 한 찰나의 순간들에 번쩍이다 사라져버린, 여전히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꽉 짜여진 하나의 영화적 세계에 사는 인물들답지 않게 종종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는 등장인물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당황스러운 점은 영화가 진행되는 지리상의 특징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이곳의 지도를 그리기란 불가능하다. 비교적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거점으로서의 마을의 모습들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이들의 동선은 선을 그어 이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끝없이 펼쳐진 땅 위에 버티고 선 모뉴먼트 밸리의 존재 때문에, 사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이 되돌아온다고 느껴지거나 영원히 헤매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장 정교한 지도처럼 생각되는 영화에 이처럼 지도를 그릴 수 없다는 특징이 들어있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맹렬히 추격하며 어딘가를 향해 말을 타고 달리고 있지만 그야말로 땅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혹은 되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나는 동시에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 사로잡힌 형상, 되돌아오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의 이미지들을 ‘실제로 되돌아온다’는 서사로 번역함으로써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역마차>의 돌아옴을 완수하는, 그러니까 마침내 지도를 그리고야 마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장르 영화에 대한 아주 멋진 대답이 아닐까 제멋대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영화를 다시 보니 사태는 그리 간단히 정리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앞서 말했던 ‘해석’의 실패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지도 그리기를 시도했으나 한 편의 영화 안에서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우리는 그릴 수 없는 지도를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지도란 고정점을 중심으로 그려져야 하는 것일텐데, 이 영화가 그리는 일종의 난장과도 같은 2시간의 진행에는 도무지 그 고정점이 없다. 손상되는 단단한 육체와 디지털의 표면, 무성 영화적인 액션과 과시적인 사운드, 모래 폭풍의 보이지 않는 아득함과 시야를 가득 매운 디테일, 어떻게든 현실로 번역하고 싶은 세계관 고유의 장치들의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가능한 완전한 기능.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요소들은 자신의 최소와 최대를 자유로이 오가며 매 순간을 가장 충만하게 구성한다. 혹은 이 정돈되지 않은, 방향과 속력이 없는 상태야말로 이 영화의 최적의 방향이며 속력인 셈이다. 항상 죽음 이후의 삶을 그리는 ‘워보이’ 눅스가 재번역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며, 부발리니 전사들이 퓨리오사와 함께 죽음도 불사하고 시타델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며 끌어안은 ‘지금 여기’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심원한 감동을 안기는 것 역시 이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맥스가 그린 지도 상에서는 저곳에서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여정 위에 있지만 그들에겐 지금 현재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 장대한 세계에서 과거가 없는 이가 어디 있겠냐만은 맥스만이 그 과거를 환상의 형태로 대면한다. 그는 말 그대로 과거에 사로잡힌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이 지도를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이곳 사막은 삶의 터전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경로의 일부이며 지도의 어느 부분이다. 그는 어딘가에서 와서 다시 어딘가로 떠날 사람이지만 퓨리오사와 브리더들에게 이곳은 삶의 공간이며 눅스와 부발리니 전사들에게 이곳은 죽은 몸이 묻힐 무덤과도 같은 곳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나는 왠지 그 말을 하는 순간 여기에서 멀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보았다시피 이곳은 지도를 그리는 자를 위한 곳이 아니지 않은가. 한 편의 영화가 자기 안에서만 맹렬하게 타오를 때, 그것을 조각내 가져온 다음 내 입의 할 말을 위해 쓰는 것은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가. 이것은 이 영화뿐 아니라 모든 영화를 대하는 내가 언제나 다짐해야 할 말일 것이다. 지도는 영화 안에서는 그려질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충만한 지금 여기만을 생각하며 거기에, 그 영화에 뛰어드는 것뿐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시 별을 보면서, 영화의 바깥을 이어 지도 그리기를 지속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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