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국제다큐영화제 앵콜 상영전에서 <카메라를 든 사람>을 보았다. 25년간 <화씨 9/11>, <시티즌포> 등을 포함한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현장을 누벼온 커스틴 존슨의 개인적인 회고록이자 여성들의 삶의 기록이며 그녀가 여전히 경이감을 느낀다는 장면들을 모으고 재구성해 만든 작품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카메라에 담은 영상들과 감독 자신의 어머니와 쌍둥이 자녀가 등장하는 홈비디오 장면들이 나란히 이어 붙여진 형식의 이 영화는 양을 치는 노인을 찍기 위해 말을 타고 다가가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보스니아, 뉴욕,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라이베리아, 우간다, 워싱턴D.C 등을 분주히 오간다. 전혀 만날 것 같지 않던 장면들이 만나고 마주보며 서로 밀착해 만들어내는 질문들은 삶과 카메라 사이를 빼곡히 채우며 잊을 수 없는 순간을 펼쳐 보인다. 한 편의 영화를 찍기 위한 과정이기도, 진실을 포착하려는 카메라의 안간힘이기도 혹은 아주 개인적인 순간들을 영원히 붙들고자 하는 내밀한 욕망이기도 한 여러 개의 장면들은 찍히는 대상과 찍으려는 카메라, 그리고 그 카메라를 든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영화를 관람하기 전, 유튜브에 공개된 클립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자크 데리다가 출연하는 다큐멘터리의 촬영 도중 길을 건너던 데리다가 문득 카메라를 향해 카메라 뒤 사람의 시야를 걱정하는 말을 건네는 장면이다. “그녀는 내 주변의 모든 것을 보고 있지만 자신의 주위는 볼 수 없네요. 우물 속에서 별을 바라보는 철학자의 이미지와 같죠.” 이 짧은 클립은 여러모로 감동적이었는데, 그녀She라는 인칭대명사와 ‘Cameraperson’이라는 영화 원제의 공명 때문이기도 했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화면 밖 사람, 아니 화면을 들고 있는 사람에 대한 언급 때문이기도 했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그녀들의 영화이고, 카메라를 든 사람의 영화이며 무엇보다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영화다. 여기에는 전쟁 지역의 강간 피해여성,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감독의 어머니, 어머니의 자살을 경험한 또 다른 여성감독, 나이지리아의 조산사, 권투선수 아들을 둔 어머니, 낙태 진료소에서 출산을 고민하는 여성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또 감독은 종종 화면을 가득 매운 하늘에서 불현 듯 치는 번개를 보고 감탄하거나 카메라의 위치를 분주하게 조정하고 도끼를 가지고 노는 내전 지역의 아이들을 걱정하며 바라보고 카메라 앞의 사람을 향해 말을 건다. 그리고 여기에 끼어드는 몇 개의 다른 장면들은, 역학관계에 있는 원자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어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을 하는 물리학자나 잔혹한 인종혐오 살해사건의 증거 사진들을 유가족의 동의 없이 보여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변호사, 잔혹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영상에 저항해야 한다는 반정부 영화운동단체 활동가의 얼굴들이다. 이러한 장면들의 반복은 물리적인 거리가 좁혀져 합치되는 대신 마치 역학관계에 있다는 원자들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거나 때로는 충돌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참혹한 사진 대신 범행에 쓰인 쇠사슬의 육중함을 보여주는 변호사의 모습은 세계 곳곳에 흩어진 삶과 폭력의 흔적을 찾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혹은 비가시적으로 배열하려는 감독의 고민으로 연결되어 운디드 니, 세계 무역 센터, 학살의 흔적이 남아있는 교회와 강간범죄가 자행된 세르비아의 건물과 같은 장소만을 찍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영화를 본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한 소년은 파편에 맞아 눈 한 쪽이 실명된 상태다. 이어진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부상 당시 소년이 남동생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편은 동생의 얼굴로 날아들었고 얼굴의 대부분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소년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조용히 울기 시작한다. 카메라 뒤 누군가가 질문을 던진다. “혹시 그 장면이 꿈에 나온 적도 있나요?” 소년은 울고 있기 때문에 질문을 듣지 못한다. “못 들었어요. 다시 한 번 질문해주시겠어요?” 카메라 뒤의 사람은 여러 번 말을 고르다가 끝내 처음의 질문을 반복하지 못한 채 울먹인다. 혹은 영화의 후반부에는 보스니아 내전의 참혹함을 찍겠다는 처음의 다짐을 대부분의 촬영 분량과 함께 버린 후 소규모 공동체의 따뜻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찍은 부분만을 남겨 그들에게 다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종종 위태롭고 흔들리며 출발한 곳과 목표한 곳은 어긋나고 때문에 머뭇거림과 우연이 곳곳에 묻어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에 위엄과 경이로움을 부여한다. 우리가 흔히 ‘찍는다’는 활동을 말하며 습관처럼 되뇌는 윤리적인 태도는 숭고한 출발과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멈칫거리며 어긋나는 길 그 자체에 새겨지기 때문이며, <카메라를 든 사람>은 바로 그러한 과정을 찍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그러나 머뭇거리며 경계를 탐구하고 그것들을 계속해서 자신의 내부에 새기면서 이 영화는 또 한 가지 질문의 자리를 마련한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내내 카메라의 존재와 그것을 촬영하는 감독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거리가 줄어든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결코 카메라 너머 대상에 가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차 안에서 밖을 찍기 위해 투명하게 닦여야 하는 유리창, 피해자의 사진을 보여줄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변호사의 짧은 침묵, 강간 피해자로 추측되는 딸에 대해 묻는 질문에 노년의 여성이 결코 대답하지 않은 말,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 소년의 왼쪽 눈이 보는 어둠이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 아득하게 끼어있다. 혹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감독의 어머니는 줄곧 등장하지만 걸음의 목적을 모른 채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마치 곧 화면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운이 든다. 그리고 갑자기 거기에는 거센 바람이 불어 어머니의 모습을 아득하게 덮어버린다. 또 다른 여성감독의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이후 홀로 유품을 정리하는 순간을 카메라로 찍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곧 종이뭉치 등의 유품들을 사방에 집어던지며 정신없이 화를 내고 주저앉아 우는데, 카메라는 다소 짓궂게도 그 얼굴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때 굉음을 내며 창밖에 눈 무더기가 쏟아져 내리고 카메라는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혹은 우리가 결코 알기 힘든 생명의 순간들도 말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울거나 숨 쉬지 못했던 아기는 조산사의 노력 끝에 숨을 내쉬며 울음을 터뜨린다. (물론 우리는 죽음의 순간들도 알기 어렵다.) 아마 훨씬 많은 장면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카메라와 그것이 찍는 대상 사이의 거리는 도저히 닿을 수 없을 만큼 멀고 아찔하게 느껴진다. 아니, 건너편에 닿고자 하는 욕망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이 장면들에는 있다. 가늠할 수 없이 깊은 침묵, 결코 재현할 수 없는 다친 눈의 시선, 자꾸만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모습,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거기에 끼어들어있는 우연들. 이러한 장면들이 쌓여갈 때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때로 카메라를 경유하면 나와 당신 사이에 일직선의 경로를 그어 마침내 건너편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카메라를 든 사람>의 어떤 장면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결코 가 닿을 수 없으리라 예감되는 순간들, 그 닿을 수 없는 거리,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지이자 도착지이다. 그 거리를 영원히 헤매는 것만이 우리가 갈 수 있는 최선의 여정인 것이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카메라를 든 사람>은 목적지를 잃음으로써 도착하는 영화다.


(길지 않은 글에 기억나는 장면들을 다소 우겨넣다시피 나열했다. 능력의 부족이기도 하겠으나 이 영화는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풍부한 장면들의 연쇄의 영화다. 또다시 극장에서 볼 날을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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