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소설은 독후감을 헵타포드 문자나 수학의 방정식, 혹은 음표의 나열이나 완성된 바둑 기보같은 것으로 쓰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한다. 이 짧은 단편소설을 읽고 느끼는 바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속에서 무언가 일렁이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표현할만한 좋은 수단을 아직 모른다. 미끌어지는 이 글로 계속 거기에 가 닿기만을 바라며 부딪히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슬프지만 즐거운 일이다. 덕분에 나는 글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사고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은 편이다. 민족국가마다 사용하는 언어와 그로 인한 문화가 다르다는 것도 그러한 중요한 예시 중 하나이다. 혹은 수화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소설도 그러한 큰 줄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어느날 지구에 등장한 외계 생명체와,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언어학자. 새로운 언어를 배워감에 따라 그의 인식체계는 점차 변화해간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소설이 대단한 건 그 어마어마한 헵타포드 언어를 경유해서 결국 한 인간의 '이야기'로 돌아온다는데에 있다. 그러한 귀결은 보통 염려를 불러 일으키게 마련이다. 이미 촬영과 편집을 마치고 국내에서도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arrival>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바라보는 나의 심정도 비슷하다. 이는 <네 인생의 이야기>를 각색해 만든 영화인데 드니 빌뇌브 감독, 에이미 아담스 주연이다. 감독에 대한 개인적인 불신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내용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것에 더 염려가 컸다. 사실상 '우주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우리 인간에 대한 이야기죠' 라는 하나마나한 말을 하는 '우주 영화'는 이미 많이 있는데다가 그러한 영화들이 관심있어 하는 것은 우주를 그럴듯하게 찍으며 사실 보수적인 이야기로 회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결말부분에서 돌아오는, 그리고 제목에서 사용하고 있는 story란 이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역시 헵타포드 언어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말을 하기는 생각보다 쉽다. 영어 단어나 문장의 순서 등을 예로 들면서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손쉽게 서술하는 글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혹은 눈snow을 기술하는 수많은 단어가 있다던 이누이트족의 언어를 떠올리게도 된다. (지구에 도착한 그 생명체인) 헵타포드들의 언어는 이런 종류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의 언어는 사회속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는 인간의 언어들이 아니라 지구에서 통용되는 물리학 기술의 거울쌍처럼 이해된다. 그러니까, 동일한 우주를 설명하는 두개의 문법이라는 뜻이다. 물리학자 게리가 주인공 루이스에게 헵타포드들에게서 얻은 물리-언어적 성과를 말해주는 대목이 있다. 빛이 공기에서 직진하다가 물을 만나면 굴절된다는, 이해하기는 쉽지만 증명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미분이 아닌 변분법이 필요하다는 현상을 헵타포드들은 가장 간단한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 지구에서 통용되는 간단한 계산들을 말하기 위해서 헵타포드들은 어렵고 복잡한 방법을 거친다. 동일한 우주 속에서 동일한 우주를 자각하며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우리의 사고 체계는 완전히 반대로 뒤집혀 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목적지를 안다는 것, 모든 사건을 동시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목적을 지각한다는 것. 맥락과 우위가 없는 사고. 도대체 이것들이 왜 나에게 이토록 강력한 감정으로 다가오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이런 대목들에서 멈춰선 나는 이 소설이 내 인생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우주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에 대해 말하는, 사실상 우주를 그냥 '사용'하기만 하는 이야기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단계를 꼼꼼히 채운 걸작들도 종종 탄생한다. 영화 <빛을 향한 노스텔지어>가 아마 중요한 예시가 될 것이다. 영화는 천문학자들의 말을 빌어 우주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보는 별의 빛은 과거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별을 보는 것을 역사를 보는 것일 수 밖에 없으며 우리 인간은 별이 탄생할 때 만들어진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별을 관찰하기 좋은 장소라는 칠레의 아따까마 사막. 그 사막에서 시작된 별의 이야기들은 사막 속에 묻힌 사람들의 역사로 이어진다. 이 아름답고 슬픈 영화가 놓치지 않고 끌어안은 것은 우주물리에 대한 이해가 곧 인간과 실제 세상에 대한 이해가 되는 논리적인 귀결이다. 나는 이 영화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채널의 <코스모스>시리즈를 번갈아 보면서 결국 우주에 대한 이해가 내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연속성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가능해진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져가는 현재에 살고 있으며, 전체 우주의 유의미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나는 헵타포드가 아니기에 미래까지 동시에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매번 걷던 길을 걸으며 과거의 겹쳐진 시간을 감각하려고 노력해볼 수는 있다. 그리고 우습지만 그럴 때야말로 나는 세상에 '친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결코 완전하지 않은 언어로 우주 속의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것에 대한 믿음이 나를 감동 속에 살아가게 한다. 


이 소설이 내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내게 비슷한 감동을 주었다. 인간은 결국 자기 삶을 '이야기화' 시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주의 질서와 신비로움이 언제나 세상을 목적론적이고 동시적으로 인식할 것을 제안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인과를 찾고 순차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다. 세상의 연속성과 역사의 목적을 알면서도 결국 삶 속에 뛰어들어 살아갈 것인가? 루이스는 인간이라는 굴레 속에서 결국 살아갈 것을 수락하면서, 한쪽 눈은 내내 밤하늘을 바라볼 것이다. 끊임없이 그에 도달하려고 애쓰면서. 마치 운동하는 세상에 글이 끝내 일치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갈 것을 알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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