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해 크레모니니에게 우리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그런 힘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크레모니니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런 철저한 반휴머니즘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 속에서 우리 자신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의 그림 속에서, 여기서는 회화지만 예술에 의해 제공된 특수 형식 내에서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 그림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레모니니가 '인간'에 대해 '그리고 있는' 것이 오직 인간의 현실뿐이라면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와 개성조차도 만들어내고 인간의 존재 내에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추상적' 관계만을 그려낸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회화 작품이 남에게 보여지기 위해 그려질 뿐이라는 것을 크레모니니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사유 속에서 자신의 본질에 대한 예리한 '시선'에 의해 결정된 객관적인 한계 내에서 스스로를 실제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인간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그려질 뿐이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크레모니니는 이렇게 위대한 혁명적 사상가, 이론가, 정치가, 위대한 유물론 사상가들에 의해 인간에게 열려진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상가들은 인간의 자유란 관념적인 자유 인식이라는 자기만족에 의해 성취되는 게 아니고 인간의 노예상태가 왜 생기게 되었는가 그 법칙을 앎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구체적인' 개성의 실현은 인간을 다스리고 있는 추상적 관계를 분석하고 거기에 정통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자기자신의 수준에서, 자신의 수단으로, 철학이나 과학이라는 요소가 아닌 회화라는 요소로 크레모니니는 똑같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 추상 화가는 위대한 혁명적 철학자와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구체적인 인간,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인간 즉, 우리들을 위한 회화가 아니라면 어떠한 것도 그리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추상'을 그리지 않을 것이다.


모든 예술 작품은 미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계획으로부터 탄생한다. 그것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존재할 때 그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그것이 우리에게 가시화시키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처음 시작하는 비평과 지식 유형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인 효과를 생산한다. 너무 짧은 게 유감이지만 에스따블레 Establet가 최근에 발표한 글에서 옳게 지적했듯이, 미적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이 '문화'의 일부가 아닌 것은 생산도구(기차)나 과학적 지식이 '문화'의 일부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나 생산수단과 지식, 혹은 제과학의 집대성을 포함한 다른 모든 대상과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은 이데올로기적인 것들 중 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인 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관계 체계로 끼워넣을 수 있다는 말인데, 이 이데올로기적인 것들은 '인간' (즉, 우리 계급사회 내의 사회계급 성원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가상의 관계 속에서 반영하고 있다. 인간이 그 이데올로기적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는 자신의 '존재조건'을 구성하고 있는 구조적 관계이다. 혹자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주장할는지도 모른다. 예술작품의 특수 기능은 예술 작품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취함으로써 현존 이데올로기의 (작품형식 중 한가지의) 현실을 가시화시키는 것 donner a voir 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은 직접적인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반드시 발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이데올로기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예술작품과 이데올로기의 특별 관계 즉, 예술작품의 직접적이고도 불가피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고려에 넣지 않고 특수한 미적 존재를 취하고 있는 예술작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위대한 혁명적 정치가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혁명적 철학자가 자신의 어떤 입장 선택으로 인한 역사적 효과들을 심지어 자신의 사고의 엄격하고 객관적인 체계 내에서 고려해보듯, 위대한 예술가라면 자신의 작품 자체 내에서, 작품의 배열과 유기적인 내적 조직 내에서 작품의 존재로 인해 필연적으로 야기되고야 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책임성에 대한 이런 가정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든 아니든 그건 별개의 문제이다. 어쨌든 '의식'이 유물론적 원칙 속에서 파생적인 조건부의 입장을 생각할 때조차도 우린 '의식'이 제2차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66년 8월



(레오나르도 크레모니니의 작품들)

Alle Spalle del Deside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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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dé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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