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싼샤에는 매일 많은 배와 사람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 그들은 마음속에 칼을 하나씩 안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싼샤에 온 것입니다. (...) 지금 중국은 자기가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건 자기 삶의 어느 순간을 칼로 내려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무협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입니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 말은 지아장커 감독이 자신의 영화 <스틸 라이프>에 대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말줄임표 인용은 남다은 평론가가 쓴 <천주정> 비평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요약하자면 지아장커는 무협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 않은 영화 <스틸 라이프>를 설명하면서 '무협의 정신'에 대해 말했고, 정작 무협의 스타일과 액션이 주가 된 영화 <천주정>에서는 그러한 고민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저 감동적인 말은 나도 <천주정>이 나오기 전에 읽었고, 이런 말은 대개 잊어버리기 어려운 법이다. 기다림 끝에 본 <천주정>은 아무래도 핀트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아쉬운 마음이 많이 남았었다. 그러다가 <자객 섭은낭>이 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혀 다른 곳에서 온 영화, 그렇지만 사실상 지아장커의 저 말은 마치 <자객 섭은낭>이라는 영화를 기다린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마음 속에 품은 칼, 그 칼로 내려치는 삶의 어느 한 순간. 그러니까 이 영화는 끊어낸다는 것과 인생에 대해서, 결단이 필요한 순간과 그 순간을 대면하는 영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객 섭은낭>에는 매 순간 삶의 향방을 결정하고 끊어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여성들이 있다. 관료의 집에서 태어났으나 자객으로 길러질 수 밖에 없었던 은낭(서기)이 그러하고, 은낭의 스승으로서 모습을 감추고 살아가는 가신공주가 그러하며 위박으로 시집오면서 자신의 과거를 단호히 끊어냈던 가성공주, 전계안의 본처인 전원씨가 그렇다. 여기에 전계안의 첩인 호희의 이야기도 더해야 한다. 이 여성들의 삶은 서로에게 완전히 의존적이거나 전혀 상관없이 동떨어져있지 않고 기이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시선을 통해 연결된다. 많은 이들이 말했듯이 이 영화의 리버스숏은 정확하게 매치되지 않는데, 이를 두고 '마음의 시점숏'이라는 아름다운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온전히 은낭의 것이지만 이런 점들도 동시에 말해져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은낭을 보는 것은 모두 여성이다. 전원씨가 그랬고 전계안의 침소에서의 호희가 그랬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자신을 숨기는 은낭을 멀리서도 알아보는 것은, 전계안과 정략결혼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입지를 상기하며 자신을 지켜야 하는 전원씨이다. 수겹의 베일 너머 은낭의 일렁이는 모습을 알아보고, 전계안으로부터 은낭의 사연을 들은 후 일렁이는 은낭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은 호희이다. 혹은 숲속에서 문득 나타난 의문의 자객 정정아만이 은낭의 유일한 적수이다. 그런가 하면 가성공주는 자신의 과거와 절연하고 은낭을 염려하며 옥결을 남겼는데, 옥결은 다름아닌 단절을 의미하는 사물이라고 한다. 영화가 '시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가며 시점숏을 사용하는 것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형식적인 지점은 바로 화면비이다. 내내 1.33:1로 진행되던 영화가 단 두 장면, 주체가 분명하지 않은 플래쉬백 속의 가성공주가 칠현금을 켜는 장면에서 1.85:1로 바뀐다. 감독은 이에 대해 칠현금의 긴 길이 때문이라거나, 만화적인 프레임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했지만 이러한 선택이 주는 효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니까, 가성공주만이 이 영화에서 '넓은' 화면비를 쓰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물을 가두는 효과를 낸다. 가성공주는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슬피 울었던 난조의 처지가 그러했을까. 1.33:1이라는 '좁은' 화면이 주는 유려함과 활력이 이 넓은 화면에는 없다. 다만 문득 바람이 불어 꽃이 흔들릴 뿐이다. 이미 삶의 어느 부분을 끊어낸 사람, 그러나 그 사람의 앞날에는 무언가를 끊어낼만한 힘이 없었던 것 같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 무언가를 끊는다는 것. <자객 섭은낭>은 그런 영화이지만 영화를 이루는 요소들은 도무지 끊어지지 않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 대사가 많지 않은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대신하는 것은 흔들리는 촛불, 바람, 일렁이는 베일, 햇빛과 그림자, 연기와 안개같은 것들이다. 거의 인물 대신에 화면이 흔들린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문득 바람이 불어와 들판이 한껏 흔들리고 겹겹의 베일은 천천히 운동을 반복하며 그 너머를 보여주기도, 다시 보여주지 않기도 한다. 실내에는 항상 촛불이 가득 켜져있어서 아득히 흔들린다. 이 느릿한 움직임들 사이에 인물이 배치되고 사물과 인물 사이의 거리가 느껴지며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바람이 담긴 풍경은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것들은 칼로 벨 수 없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바람이 그렇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불어가는 바람은 우리가 그 방향도 질감도 바꾸어놓을 수 없다. 이는 마치 우리가 품고 다니는 칼로도 타고난 운명을 벨 수 없고, 결단의 순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은 계속 흐르고 바람은 계속 분다. 은낭은 스승인 가신공주의 판단에 따라 세상의 도를 세우기 위해 방해가 되는 자들을 베어야 하는 자객의 운명을 따른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그녀가 베야 하는, 그리고 운명이 바뀌기 전 결혼하기로 되어있었던 전계안도, 그가 사랑하는 호희도 베지 못한다. 품은 칼을 꺼내 과거를 잘라낸다면 이러한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여 자객의 길을 가는 것이 오히려 더 영화의 진행에 들어맞는 설명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은낭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전원씨의 사주로 주술사는 물과 연기를 이용해 호희를 암살하고자 한다. 흐르는 물과 자욱한 연기가 호희의 몸을 감싼다. 칼로 벨 수 없는 이것들로부터 은낭은 호희를 구한다. 그리고 가신공주에게 명령을 따를 수 없다, 전계안을 벨 수 없다고 말한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칼로 위박을 혼란에 빠뜨릴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벨 수 있되 베지 않는 자이다. 혹은 그녀는, 벨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이다. 시점숏은 일치되지 않은 채 튀고 자객인 은낭은 문득 자취를 감춰 장면들이 분절되는 이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은 들판을 돌아 멀리까지 멀어져가는 은낭의 일행을 비추는 것으로 끝난다. 자객의 삶을 살지 않기로 결단하고 사람들의 곁에 머물며 다음 삶의 도착지를 향해 떠나는 은낭. 나무 그늘에 가려져 모습을 잠시 감췄던 이들이 햇빛을 받으며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의 감흥은 이 영화 전체를 요약한다. 이 장면에 이르러 마침내 은낭은 끊어냄으로서 이어지는 길을 걷는다. 


단절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들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화두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전이 없다는 듯이 영화를 만들었다. 과거를 부수면서 변화하는 세상을 끊임없이 대면하고자 했고 그것들을 모두 영화로 만들었다. <자객 섭은낭>은 '대만의 현재'에서 벗어나 과거로 회귀한 것처럼 보이는 영화이지만 사실은 훨씬 멀리 나아간 영화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품은 칼을 꺼내 내려치는 순간, 그 결단의 순간만이 끊임없는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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