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든 마술사는 자신이 설 무대를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스코틀랜드의 작은 술집에 처음 전기가 들어오던 날, 그래서 작은 백열등 하나가 켜졌던 날 마술사도 그곳에서 마술을 했다. 사람들은 마냥 기쁜듯이 박수를 쳤고 일하는 소녀는 모든 것이 신기하다. 마술사는 소녀의 닳은 비누를 새 비누로 바꿔줄 수 있고 소녀의 닳은 신발을 새 구두로 바꿔줄 수 있는 마법사였다. 이제 두사람은 도시로 향한다. 많은 것이 바뀌고 있는 도시로.

느릿한 움직임, 거의 없는 대사, 변화하는 도시의 풍경과 필연적으로 대비되는 사라지는 것들. 여기에는 아름답고 슬프고 쓸쓸한 풍경이 느긋하게 마주치며 만들어내는 처연한 리듬이 있다. 창문 밖으로 베개의 깃털들이 새하얀 눈처럼 날리는 순간. 무대 위에서 점점 작아지고 혹은 좁은 곳으로 옮겨가는 마술사의 자리. 그는 밤의 주유소나 큰 간판을 도색하는 것 같은 일을 추가로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고 소녀는 그에게서 도시의 삶에 어울리는 마법을 기대한다. 마술사가 딸을 떠올리며 준비한 구두를 보고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오해하는 소녀의 모습이나 호텔방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오가며 빚어내는 리듬, 주유소 등에서 발생하는 소극들은 켜졌다가 꺼지는 불빛들처럼 가만가만히 빛나고 또한 슬픔을 준다. 마술사와 마찬가지로 호텔에는 이제 갈 곳이 없고 또 사라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술에 취한 인형술사나 삶을 끝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머물다가 떠나고 또 누군가는 도착한다. 길거리의 텔레비전 가게는 홀로 환하게 빛나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이 모든 광경들 앞에서 우리는 너무 아름다워서 슬퍼진다는 말 대신 슬퍼서 아름다운 삶의 풍경을 본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대개 소멸을 매개로 작동하고 슬픔이 만들어내는 리듬은 어딘가 중독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자리를 찾으며 떠돌아다니고 사라짐을 예감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고 그것이 담긴 느릿한 움직임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면서 동시에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만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볼 수는 있겠다. <일루셔니스트>에는 유독 창 너머에서 바라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소리는 더 작아지고 동작이 상황을 짐작케 하며 더 나아가서는 마치 그림자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창 너머에서 삶의 풍경을 바라보고 또 그것들이 너무 슬퍼서 아름다울 때, 나는 왠지 이제 명언으로 굳어진 채플린의 말이 생각난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사실 이것은 이런 말이었다. 희극은 롱쇼트로 비극은 클로즈업으로 찍는다는 것. 창문 너머 쓸쓸한 삶의 모습을 바라볼 때 그것은 도시의 운명, 사라져가는 것들,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득 품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풍경에 새기며 비극을 초월한다. 

알려진 것처럼 영화의 원작 시나리오는 자크 타티의 것이다. 이것은 타티가 자신의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점점 무대를 잃어가는 마술사와 여러가지를 대비시켜 보여주지만 그가 잘못 들어간 영화관에서 스크린 속 타티와 마주하는 장면은 텔레비전 상가를 지나갈 때보다 훨씬 늦게 등장한다. 늦게 도착한, 그러나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운명. 그때가 되어서야, 마술사가 떠나고 나서야 달빛은 창을 통과해 벽에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이 장면이 주는 감동은 적어도 내게는 많은 것들을 넘어서있다. (영화란 결국 무엇일까?) 그가 떠나며 남긴 말이 머릿속을 한참 맴돌면 (Magician do not exist.) 분주하던 도시의 불이 하나 둘 씩 꺼진다. 영화는 원래 이렇게 슬픈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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