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별렀던 미미여사의 책을 드디어 완독했다. 아무래도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영화를 보고 쓰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이것저것 들었던 생각들을 애써 정리하지 않고 길을 잃듯이, 말을 흩뿌리듯이 구석구석 가볼까 한다. 


미야베 미유키에 대해 들었던 인상적인 말이 있다. 그녀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르면서 출판사에서는 차를 사줄테니 이제 버스와 전철을 타고 출근하지 말고 편하게 차로 출퇴근하기를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제안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집에서 나와 시장을 따라 걷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출근하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이후로 계속 책을 찾아 읽으려 노력했지만 이제서야 <모방범>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총 3권 그러니까 원고지 6000매 정도의 분량이다. 내가 가는 모든 도서관마다 3권이 대출중인 현상이 일었지만 어찌저찌 구해서 읽었다. 


거품경제가 꺼지고 사람들이 이유없이 사라지는 이른바 '인간증발' 현상 조차도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될무렵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성의 잘린 팔이 공원에서 발견된다. 미끼를 던지듯이 연쇄살인의 증거들이 던져지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일상과 사건의 전개가 이 소설의 내용이다. 2016년에 이 소설을 읽는 나는 맥없이 강남역 살인사건과 같은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의 사건들을 떠올렸고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를 계속 생각했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1994년 발생했던 지존파 사건을 주축으로 삼풍백화점 붕괴와 성수대교 붕괴 사이를 돌아다니며 90년대의 공기를 물어보는 영화다. 영화에는 지존파 사건 당시 (이 사건은 원한관계등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특정 집단에 의해 행해진 무차별적인 연쇄살인 사건으로 당시 큰 충격을 주었다. 지존파 멤버들은 검거 된 후 부자들을 증오하며 정말 죽였어야 할 사람들을 죽이지 못해 안타깝다는 발언을 했다.) 사건에 깊게 연관되어있는 형사, 교도소에서 그들을 담당했던 종교인 등의 인터뷰가 상당부분 인용되어 있는데 이들은 잔혹한 범죄앞에서의 분노, 당황스러움과 그들을 개인적으로 보았던 사람들로서 느끼는 인간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 사이에서 끝내 갈등한다. 6000매가 넘는 소설 <모방범>에서도 어떤 감정이 느껴진다. 범죄 스릴러에 대한 작가 특유의 재능이 이 소설을 힘있게 밀고 나가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두명의 범인에 대한 세세한 설명 역시 놓치지 않는다. 물론 다른 모든 인물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그 설명 자체에서는 어떤 연민도 느껴지지 않지만, 우리가 '사연'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논픽션 다이어리>를 함께 떠올리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악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위험하고 나쁜것 만큼이나, 악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하는 것 역시 '이해'의 극단적인 측면이 아닐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해버리는 것 말이다. 이것은 저열한 선긋기가 포함되는 행동이다. 반면 어떤 식으로든 흔들리고 스스로가 연루되어있다고 느끼는 일련의 과정들 내부에서는 선긋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선을 긋지 않는 행동이 고결함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해 세상을 감각하려는 사람들의 설명되지 않는 본능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르포작가 시게코는 차분히 감정을 배제하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인간 내부의 어둠에 대해 쓰고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사건의 가장 가운데까지 가는 인물이다. 혹은 신이치를 따라다니는 메구미는 신이치의 가족을 살해한 자신의 아버지 역시 피해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가장 구체적인 활동과 가장 추상적인 활동을 동시에 진행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어둠이 있으며 구조에 기입된 악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 자신은 그것을 외부에서 설명하기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상처입히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일 것이다. 구체적인 피해자들은 인간의 어둠이니 구조적 불행이니 하는 설명을 이해하면서도 공감할 수 없고 끝가지 거기에 저항하며 이야기를 지탱한다. 요컨대 (가해자 역시) '구조의 피해자'라는 말을 나는 언제가부터 다르게 받아들여왔다. 그것은 면죄부의 표현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언제나 한쪽으로 기울어져있고, 우리가 하는 행동이 언제나 방향을 가진다는 것.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것조차 방향을 가지며 모든 행동이 편향적이라는 뜻이다. 더불어 가해자의 위치를 흐릿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나 자신'을 겨냥한 표현인 것이다. 구조의 바깥에서 사건을 재단하고 내려치듯 단정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든 연루되어있다고 말하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느껴야 할 감정이 단지 슬픔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참혹함, 섬뜩함, 결국엔 죄책감과 비슷한 감정의 잉여라고 말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극악무도한 사건을 사회 안에서 생각하는 의의가 아닐까.


이런 방식의 연루는 <모방범>안에서 '피스'라는 인물의 구체적인 활동으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이 사람의 살인과 행동에 연루되는 것은 관객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나는 요즘 크게 화제가 되었던, 가수 티파니의 SNS 사건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티파니의 행동은 잘못이고 문제이지만, 프로그램에서 하차당하는 것은 부당하고 안타깝다'고 말하는 것에는 무언가 빈틈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빈틈이 없어서 이상한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잘못에 대해 우리는 어느정도로 합의하고 있을까? 전범기는 일종의 기호다. 사회 안에서 통용되며 구성원들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국주의의 기호이므로 금기시되는 것이고 우리는 이를 상식선에서 다루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시에 그러한 비난이 가해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기호가 소비되는 방식과 그에 대한 금기를 체화하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하켄크로이츠와 비교했지만 어림없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전범기에 대한 금기를 체득하는 방식은 결코 제도화된 교육 속에 있지 않으며 개인적인 비난과 '매국노'라는 욕설화된 단어를 경유해 이루어진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라면 기호의 사용 혹은 기호의 잘못된 사용이 모두 구경거리로 소비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물론 이것을 (구경꾼) 개개인의 잘못으로 따지고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피스가 저지르는 살인이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방식도 똑같다. 이야기는 팔린다. 피스는 그 이야기 자체가 고도의 심미성을 띄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는 인물이다. 책 속 세계에는 그것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에게 이것은 여전히 섬뜩하다. 구경꾼이 있으면 살인은 멈춰지지 않는다.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CCTV영상을 원한다. 슬프고 끔찍한 일이라면서 영상과 사진을 실어나른다. 모든 인간은 악하다는,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말보다는 이 행동이 구체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지점은 관람이 창작을 (재)생산한다는 다소 끔찍해지는 매커니즘이라는 것을 건드리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겐 중요해보인다. 내 속에도 악함이 있다고 작게 감탄하는게 아니라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세계의 불행에 연루되어있다고 느껴야 한다. 


어쨌든 우리의 자리를 인정하더라도 언젠가 사람들은 '악'의 모습을 궁금해하고 악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이 긴 분량의 책에서 살인범인 히로미와 피스의 가정사가 낱낱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에 대한 설명이 될 수는 없다. 언제나 생각하듯이 완벽히 설명하는 것도, 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여전히 그 세상을 '나', '우리'와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그러나 어떤 악함이나 불행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악이라는 것은 무기력함, 체념, 실패의 이름들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며 자신만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우여곡절 끝에 <모방범>3권을 구했을 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신작인 <크리피>를 보았다. 이 영화는 악에 대한 영화라고 평가받았던 <곡성>을 완전히 애들 장난처럼 보이게 한다. <곡성>은 분명히 무기력으로 마주하는 공포와 의심을 다루지만 영화의 태도는 시종일관 자신만만하다. 이런 경우 오히려 남는 것은 확신이다. 불확실을 말하는 자신에 대한 확신때문에 영화는 현실의 폭력을 이용하는데서 그치고 만다. <크리피>의 경우에는, 뭐라고 해야할까. 영리한 영화이지만 악을 다루는 자기 자신을 과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심연은 그 무엇보다 크고 새카맣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섬뜩하다. 마치 이 방법이 아니면 불행을 보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크리피>의 괴이함은 <곡성>과 차원을 달리한다.


신이치의 이야기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거품경제의 여파 속에서 자신의 말실수가 발단이 되어 가족이 살해당했고, 오가와 공원에서 여성의 잘린 팔을 최초로 발견했으며 사건의 가까이에서 결코 멀어지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과거의 죄책감과 마주하기까지 용감한 행동을 멈추지 않은 소년. 그는 토막난 시체를 함께 발견했던 사람과 연인이 되어, 그 사건의 피해자 유족과 동료가 되어 남겨진 길을 걸어간다. 그러면서 말한다. 세상에는 우리의 불행을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들이 많지만, 어딘가에는 정말로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 다소 감상적이지만 여기에서 잠깐 울음을 참느라 멈춰야만 했다. 거기에는 비가 내렸다고 한다. 세상을 은색으로 물들이며.


문득 미야베 미유키가 걸어다니며 보았다던 사람들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그녀는 어떤 얼굴을 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사회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실종되어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잊혀갈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무엇이 깨졌을까. <모방범>이 남긴 감정의 잉여는 꽤 오래 갈 것 같다. 

만식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