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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의 존재들

박차민정, [조선의 퀴어]


하지만 <조선일보>의 기사는 새롭게 부상한 상업주의적 미디어의 영향력을 보여준다는 것 외에도 변화하는 죽음의 의미들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근대는 무엇보다 문명과 위생을 강조하기에 죽음과 죽은 자의 공간을 산 자의 세계로부터 분리하려 한다. 실제로 식민지 당국은 공동묘지를 오물처리장, 도축장 등과 함께 가장 먼저 도시 밖으로 옮겨져야 할 것, 즉 처리되어야 할 ‘오물’로서 다루었다. 이렇게 근대적인 죽음은 멀리 옮겨지거나 숨겨져서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에 근대적 시민들은 응당히 이러한 삶과 죽음의 분리에 대응하는 혐오의 감각을 갖추기를 요구받았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세계와 분리되지 못한 채 전근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그로’ 혹은 ‘변태 성욕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다. 탐정소설과 범죄기사에서 탐정/경찰이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범죄를 해결해 나가는 근대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면, 탐정이 극복하고 파헤쳐야 하는 전근대의 야만이자 범죄성의 원천으로 발견되었던 것은 바로 하층계급의 삶의 방식 그 자체였던 셈이다.

(p.52)

 

채석진, 「제국의 감각: ‘에로 그로 넌센스’」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

천정환, 『근대의 책 읽기』

정일영, 「일제시기 장묘제도 변화의 의미」, 「일제 식민시기 사자공간의 배치와 이미지 형성: 공동묘지와 화장장을 중심으로」

 

(...)하지만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었는데, 바로 모두 20대 남성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세대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근대적 소비 공간인 미나카이 백화점 안에 전시된 물건들을 구경하다 돌연 여자 변소 안을 엿보기로 결심한 생도, 최신식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여자 목욕탕에 난입한 스무 살의 청년, 술에 만취해 산보하던 길 위에서 다른 이의 사생활을 몰래 엿보기로 마음먹은 양복 직공, 이런 사례들은 새로운 관음증적 주체들이 근대 도시의 시각적 체험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남성들은 도시의 공적 거리를 배회하는 산책자들인 동시에, 도시 공간이 합법적으로 드러내는 것(전시된 상품들과 영화의 스펙터클 등의 공적 공간)과 숨겨지도록 규정한 것(개인의 생리 활동과 위생유지 활동, 성생활로 대표되는 사적 생활) 사이의 경계들을 관음하는 인물들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사적인 공간을 엿보는 모든 종류의 시선들이 불법적이거나 변태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특정한 시선과 이러한 시선을 통해 작동하는 관찰과 감시는 그 자체로 교육적일뿐만 아니라 근대적 시민이 갖추어야 할 규범을 체화하는 데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p.58)

 

 천정환, 「관음증과 재현의 윤리: 식민지 조선에서의 “근대적 시각”의 성립에 관한 일 고찰」

 

이러한 장면들은 성에 대한 근대적 인식이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을 통해 단시간에 확립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1890~1940년 사이 뉴욕의 도시 공간을 중심으로 섹슈얼리티의 지형 변화를 탐구한 조지 천시George Chauncey는 백인 중산계급 남성들에게 배타적인 이성애(남성과의 일체의 성관계에 참여하지 않는 것)가 남성 정체성의 필수 조건이 된 지 두 세대가 지난 후에야 동일한 변화가 비로소 유럽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계급 남성들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의 성적 체계가 다른 성적 체계로 변화하는 과정은 결코 선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계급과 인종, 지역과 같은 변수들은 이 과정에서 중대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1920~30년대의 식민지 조선은 손목을 잡은 두 남성의 모습에서 근대적 성과학을 통해 확립된 병리의 범주인 ‘동성애’를 떠올리는 계몽주의적 지식인과, 이를 ‘미동’이라는 전통적 관습을 통해 경험하는 노동자들이 뒤섞인 시공간이었다.

(p.83)

  

‘대륙 진출’이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야심찬 계획 속에서 만들어졌던 조선의 철도는 군인과 자원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실어 날랐고, 이렇게 조성된 식민지 관광붐은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는 일군의 ‘변태성욕자’들을 함께 운반했다. 철도 위의 ‘변태성욕자’들은 제국주의, 철도, 근대 관광의 교점에서 비로소 등장한, 그야말로 첨단의 존재들이었던 셈이다.

(p.85)

 

키스라고 하는 새로운 경험은 이렇게 당대의 야만과 문명, 동양과 서양, 후각과 촉각, 생식과 쾌락 같은 문화적 이분법 속에서 해석되었다. 당대 성과학의 관점에서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키스는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쾌락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도착’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이 새로운 성적 실천은 첨단, 문명, 서양과 연결되는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p.88)

 

식민지 조선인들이 “키쓰에 관한 습관”들을 학습한 것은 주로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서였다. 조선에서 영화는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매체로, 1930년대 말 경성과 같은 대도시의 연간 영화 관객은 1100만 명을 넘을 정도였다. 1937년 조선은 외화 배급사들이 도쿄, 오사카, 고베 다음의 유력한 시장으로 여길 만큼 큰 수입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p.89)

 

 노지승, 「식민지 시기, 여성 관객의 영화 체험과 영화적 전통의 형성」

 

영화에서도 키스는 그 인기에도 불구하고 항상 수난의 대상이었다. 키스신은 지나치게 자주 검열되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영화 검열관이 되기 위한 제1의 자격 요건은 키스를 싫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다. 이런 농담은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식민지 시대에 키스신은 폭탄 투척, 방화 장면과 나란히 검열을 통과하기 힘든 장면으로 손꼽혔다.

(p.92)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후천적인 ‘변태성욕’의 촉발 원인에 대한 논의들이 주로 중간계층의 소년들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하층계급 남성들의 ‘변태성욕’은 거의 서사나 맥락을 부여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원래 변태성욕자’로 단정적으로 가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당대의 많은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성과학은 ‘문명화된 서구’라는 가정 뿐만 아니라 중산계급이 특별한 성적 도덕성과 고결함을 갖는다는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대부분의 의사와 학자들이 백인 중산계급 출신으로, 자기가 속한 계급의 가치와 이해를 연구와 학설들에 반영했기 때문이었지만, 이러한 이유로 비유럽인뿐 아니라 자국의 하층게급 역시 전형적으로 비도덕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당대의 의사들은 성적인 허용성과 관능이야말로 빈민과 노동계급의 특징이며, 중산층과 상류층만이 고결한 성도덕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강력한 계급적인 편향 속에서 ‘부도덕한’ 성적 행위를 하는 중산계급 구성원은 주로 광인으로 다루어졌다. 하지만 같은 행위를 빈민이 했을 때, 그것은 부도덕한 계층적 본성의 발현이자 의지적인 선택으로 간주되었다. 계급은 성을 둘러싼 범죄에 전혀 다른 서사를 부여하는 요소였다.

(p.103)


(...)밀항과 관련된 이러한 에피소드는 “바꿔 입을 수 있는 것”이라는 의복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특성을 둘러싸고, 크로스드레싱을 통해 위계적으로 설정된 집단의 경계들을 통과passing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과 그 경계를 감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었던 긴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크로스 드레싱을 둘러싼 각축은 비단 국경 혹은 민족의 경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p.119)

 

 이화진, 「‘기모노’를 입은 여인: 식민지 말기 문화적 크로스드레싱의 문제」

  

이러한 설명은 크로스드레싱을 인터섹스intersex의 신체적 차이들이 외적으로 드러난 형태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실제로 “공안방해”의 죄명으로 서대문서에서 취조를 받은 “여장한 괴남자”는 검사 결과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닌 중성에 가까운 편”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곧 석방되었다. 크로스드레싱이 병리화되고 범죄와 연관되기 시작한 시대에, 자신의 이성 복장을 유일하게 무해한 것으로 주장할 수 있었던 이들은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닌 중성”의 몸을 가진 이들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이러한 몸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몸들은 성별을 중심으로 구축된 근대적 제도의 공백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존재들이었다. 남녀로 구별될 수 없는 아이는 성별 표기를 필수적인 정보로 요구하는 출생신고 체계에 포함될 수 없었고, 따라서 출생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사법적 처벌의 대상으로 다루어지기도 어려웠다. 1930년 부산경찰서는 양말 120원어치를 절도한 22세의 배갑술이라는 청년을 체포했는데, 체포 후 신체를 검사한 결과 그는 “남녀양성의 인물”로 판명되었다. 배갑술을 여성으로 취급해 다른 여죄수들과 같은 감방에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남자감방으로 보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형무소 측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

때로 이들은 제도의 공백에 사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제도가 확립하고자 하는 모든 경계들을 넘나들고 불안정하게 하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서대문서 “괴미인”의 생애 서사는 특히 하층계급 인터섹스의 삶에서 두드러진 특징인 유동성을 잘 보여준다. (...)

(p.147)

 

‘진정한 성별’을 규명하는 것을 넘어 이것을 신체에 고정시키고자 하는 일련의 의학적 시도 역시 이 시기 동안에 이루어졌다. 호르몬 기전의 발견과 같은 당대의 기술적 발전은 몸을 ‘교정’할 가능성을 새로이 열어주었다.

(p.154)

 

위의 두 재판의 사례는 ‘성전환수술’이 단순히 의료적인 처치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병역 의무, 재산권, 상속권, 투표권의 재조정과 밀접하게 연동된 사회적 사건으로 다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의학적 개입을 통해 인터섹스 신체들을 두 개의 성별 체계 안으로 ‘교정’하는 성전환수술을 발전시키는 것과 나란히, 이들 ‘교정’된 신체를 근대적 통치 체계 안에 안정적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일련의 제도적 중재 절차들 역시 빠르게 정비해나가고 있었다.

(p.159)


1916년에 조선에서 시행된 공창제와 창기의 성병검진 의무화조치 역시 인구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식민지 정부는 성병 확산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전염성 질병이 있다고 판정받은 창기는 완치되었다는 진단을 받지 않고는 창기업을 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이러한 조치는 여성의 몸을 1차적인 성병의 진원지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군사력과 노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성인 남성 인구의 관리라는 관점에서 이 질병에 대한 대응책이 구축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리읍의 조선음식점에서 작부로 일하던 정덕순의 일상에 의사의 ‘건강진단서’가 개입된 것은 바로 성병검진 의무화 조치 때문일 것이다. 식민지 정부는 국가가 성매매를 통제하는 공창제를 통해 성병의 위험을 제거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공창에 등록된 여성들에게 강제적인 성병검사를 하는 방식은 성병을 예방하거나 매춘업의 성장을 억제하는 효과를 내지 못했다. 여성들은 갇혀서 생활해야 하는 공창보다 자유로운 조건에서 노동이 가능하고 더 어린 나이(16세)에 취업이 가능한 카페 여급, 작부, 기생이 되는 것을 선호하였다. 이 집단에 속한 여성들의 비공식적인 성매매 참여가 증가함에 따라, 전체 매춘업 규모뿐만 아니라 조선의 성병전염률은 오히려 증대일로에 서게 되었다. 결국 1930년대에 식민지 정부는 공창뿐만 아니라 사창 역시 단속의 대상에 포함시켰으며, 일부 지방에서 여급의 건강진단서 제출을 제도화했다. 이러한 성병 검진제도는 ‘질병에 오염된’ 위험한 신체뿐만 아니라 정덕순처럼 예기치 않게 여성 그 자체로부터 ‘탈락한’ 신체들이 발견되는 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p.172)

 

 강혜경, 「일제시기 성병의 사회문제화와 성병관리」

 

(...)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피식민지인을 바라보는 제국 특유의 관점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식민지 시기 위생 정책에 대한 연구들은 조선의 위생 행정 전반이 대한제국 시기나 당대 일본과 비교해 훨씬 불완전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집행되는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해왔다. 그리고 이것은 흔히 ‘식민지인의 차이’, 즉 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미성숙함’ 때문이라는 주장을 통해 정치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총독부 관리들이나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인 절대 다수가 계몽되지 못해 미신과 관습에 사로잡힌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미 성숙한 근대인인 일본인과는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탈식민주의 이론가 아시스 난디는 피식민지인을 아동과 동일하게 간주하는 이러한 인식이 근대 식민지 체제들 안에서 거의 예외 없이 발견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적절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성숙과 성장을 해야 하는 ‘아동’의 존재와 이들을 돕는 책임을 가진 주체로서의 ‘성인’으로 상징되는 성장과 발전의 테마는 식민과 피식민의 관계에 손쉽게 유비되었다. 식민지인의 차이는 야만의 상징인 동시에 아동의 미성숙함에 대한 대응물로 간주되곤 했다.

(p.181)

 

 아시스 난디, 『친밀한 적: 식민주의하의 자아 상실과 회복』

 

성적 욕망을 성별화하고 이를 근대적 부부관계의 토대로 전제하는 이러한 문화적인 모델은 그 규범으로부터 이탈한 이들을 병든 존재로 규정했다. ‘불감증’ 혹은 ‘냉감증’의 여성들이 의학적으로 교정되어야만 하는 중요한 환자군으로서 주목받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이었다.

(p.204)

 

의학상담란에 새롭게 등장한 독자들은 자신의 신체를 자발적으로 관리하는 자기관리의 주체인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의 섹스와 정체성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환자이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부부생활’이 하나의 문화적 이상인 시대에 규범적인 남성과 규범적인 여성의 성생활에 도달하지 못한 개인들은 현대 의학의 도움을 통해 이 곤란을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불안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사이에서 명료한 경계들을 긋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p.206)

 

하지만 아베 사다는 스스로 능동적으로 쾌락의 주체가 되는 여성이며, 그녀와 그녀의 연인 사이의 모든 성행위는 학대나 폭력이 아닌 상호 동의 속에서 진행되었다. 관계의 성격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1937년의 “야수적 사디즘!”이 ‘사디즘’을 부부사이의 불평등한 성별 권력관계에 바탕을 두고 행사되는 폭력의 일종으로 그려내는 데 반해, 아베 사다와 그의 연인은 어떠한 제도적 관계에도 귀속되어 있지 않았다. 아베 사다가 자신의 파트너를 ‘이로오토코色男’, 즉 ‘에로틱한 애인’으로 불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차이로, 성적 불구로 인한 잔학성으로 아내를 물어뜯는 폭력적인 가부장과 ‘에로틱한 애인’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분모도 발견하기 어렵다. ‘사다이즘’이 “여자를 학대하기를 즐겨하는 것”으로 옮겨지는 과정은 제도화된 이성애 밖에서 이루어지는 친밀성과 에로틱한 욕망의 탐색, 그리고 욕망의 주체로서의 여성이라는 문제제기가 삭제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다이즘과 조선의 사디즘 사이의 거리는 식민지 정부의 검열과는 또 다른 의지가 여기에 개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식민지 여성의 욕망에는 이중의 괄호가 쳐졌던 것이다. 아베 사다는 식민지 조선에서 ‘방범전람회’를 통해서만 온전히 언급될 수 있었다. 범죄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개최된 이 전람회에서 아베 사다에 관한 기록은 정조대, 중국인들의 범죄용구, 다른 흉악 범죄 사진들과 나란히 진열되었다.

‘사다이즘’을 둘러싼 논의의 지형은 당대 조선에서 여성의 성적 주체성이 다루어졌던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1920~30년대에 조선의 여성들은 ‘불량소녀’ ‘불량여학생’ ‘불량부녀’등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되면서 성적 일탈과 사회 무질서의 원인으로 끊임없이 지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강박적인 언급과 실제 사건들 사이에는 큰 괴리가 존재했다. 당대의 여성들은 적극적인 성적 욕망의 주체 혹은 쾌락의 주체라기보다는 성적 대상 혹은 범죄의 피해자의 위치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변태성욕’과 관련된 기사에서도 두드러진다. 여성들이 ‘변태성욕’ 범죄의 주체로 등장하는 사건들은 매우 희소하며, 흥미롭게도 이런 경우조차도 그 내용에 있어서 남성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p.228)

 

물론 근대 이전에도 여성들 사이에 친밀성과 애착, 우애와 같은 가치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성을 중심으로 매개되는 기존의 전통적 공간을 벗어나 ‘학교’나 ‘직장’과 같은 근대적 공간에 진입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으로 여성들 사이의 관계를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공적 공간을 통해 맺어진 새로운 관계야말로 이 친밀성을 ‘낭만적 사랑’이라는 감정의 형식으로 인식하고 명명할 수 있게 만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S’를 맺은 소녀들은 흔히 편지를 주고받거나 함께 산책을 하고 영화, 연극 등을 함께 보면서 낭만적 친밀성과 독특한 또래 문화를 만들어나갔다.

(p.234)

 

 이명선, 「식민지 근대의 “성과학” 담론과 여성의 성(sexuality)」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을 중심에 놓는 낭만적 사랑은 개인들이 전통적인 가족 단위를 벗어나서 임금노동을 통해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후에야 비로소 완전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엇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주의화와 산업화는 낭만적 사랑이 지배적인 친밀성의 양식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는 해방된 이성애 커플과 나란히, 게이와 레즈비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들이 도시 공간에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산업화로 가족을 떠나 도시에 모여든 젊은 이주자들은 공동체의 감시로부터 벗어나서 익명적인 도시에서 자신과 유사한 취향을 공유하는 파트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도시에 자신들만의 가시적인 하위문화와 정체성을 만들어나갔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는 근대 국가의 부름에 따라 고등교육과 일터에 진입할 기회를 갖게 된 여성들이 서로에게서 로맨틱한 열정들을 발견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모든 친밀성의 새로운 양식들은 전통적 세계가 붕괴하고 젠더 관계가 새롭게 재조정되는 국면에서 거의 동시대적으로 등장하였다. S관계는 이성애적인 낭만적 사랑의 모방이 아니라 이와 경쟁하는 다른 종류의 낭만적 열정의 형식, 혹은 낭만적 사랑의 다른 판본이었다.

(p.235)

 

 신지연, 「1920~30년대 “동성(연)애” 관련 기사의 수사적 맥락」

 에바 일루즈,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사랑과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John D'Emilio, “Capitalism and Gay Identity”

 

당대의 동성애/동성연애 담론은 이 새로운 친밀성을 고등보통학교의 여학생 사이에서, 특히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규정했다. 동성애와 여학생들의 ‘S문화’를 동일시하는 이러한 해석은 중간계층 소녀들에 대한 훈육의 담론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S관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동성 간 친밀성을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낳았다. 남성들 사이의 동성애나 소녀기 학교라는 시공간적 제약 밖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연령/계급 관계에 속한 여성들의 동성애는 비전형적인 것으로만 다뤄지거나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들 중 일부는 자신의 죽음을 정사의 형식으로 연출함으로써 지배적인 해석에 도전했다.

(p.262)

 

앞서 다룬 ‘살인 삼각애 사건’의 두 당사자는 경성부기학원의 동창생이었다. 이들은 학창 시절부터 동성연애 관계를 맺기 시작해 “일생 직업여성으로 살며 서로 독신으로 지내자”고 다짐하고, 학교 졸업 후 금융조합에서 근무하면서도 2년 간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파트너 중 한 명이 결혼을 결심하기 이전까지 이들이 동거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근무지는 소사금융조합과 고양금융조합으로, 서로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함께 살았다. 이는 그녀들이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실험했음을 보여준다. 이 사례는 비록 비극으로 끝났지만, 경제적인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여성들 사이에서 유사한 기획들이 시도되었을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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