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와 그 영화에 대한 비평을 보고 떠올린 막무가내의 생각과 유치한 독후감. 그래서 열심히 쓴 글은 되지 못할 것 같다.


살면서 절대로 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다. 나는 비겁해지는게 세상에서 제일 싫고 두렵다. 몇가지 개인적인 경험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라도 나는 비겁함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비겁한자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비겁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나쁜 영화에 무감해지는 것과 연관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면 자신의 비겁함을 자각하면 할수록 세상은 조금 재미없어진다. 막말로 꼰대짓을 할 수 없어지니까. 이때 가장 적절한 예는 내게 스티븐 스필버그인 것 같다. (이 말은 스필버그가 꼰대였다 라는 뜻이 아니라 아래 글을 읽고 느낀점에 속한다. 즉 '영화 매체의 한계에 대해 숙고하고 있다.'의 뜻에 가깝다.) 지난 겨울 <스파이 브릿지>를 보고 술집에 모여 사람들과 했던 대화가 생각난다. 번잡함이 도를 넘어가는 요즘의 영화들 속에서 진중하고 우아한 이 영화에 대해 우리는 숨겨둔 진심을 말하듯이 조심스럽게 이 영화가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계기는 그 후에 찾아왔다.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허문영 평론가가 KMDB 사사로운 영화리스트에 <스파이 브릿지>에 대한 글을 쓴 것이다. 


이 글이 내게 어느정도였냐면, 그 자리에서 바로 두번을 더 읽고 다음날부터 매일 한번씩 읽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간격의 문제, 영화가 자기언급을 하는 방식, 특히 영화와 현실의 중첩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부분을 읽을때는 머리가 멍해졌다. 글의 말미에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이것들은 일반론적으로 놓고 보면 대단히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당연한 말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책속의 이론이 아니라 한편의 영화 속을 분주하게 훑으며 근거를 마련해가는 것을 볼때 느끼는 벅찬 감정은 이루 말하기 힘들다. 마음같아서는 전부 다 옮기고 싶지만 조금만 옮겨보자.


에이블이야말로 진정한 말의 고수다. 진술의 면에서만 보면 그의 말에는 아버지의 한 친구가 맷집과 배짱이 좋았다는 것 사실 외엔 없다. 거의 텅 빈 그의 말이 우리의 귀를 사로잡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와 ‘맞아도 계속 일어섰다’ 사이의 아득한 간격에 있다. 어떤 설명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간격이 넓어 보이는데도 앞 문장은 단숨에 뒤 문장에 도달한다. 그냥 코엔 형제의 터치가 담긴 시적인 대사라고 말하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다르게 보고 싶다. 에이블의 말은 이 영화의 주제에 대한 자기 언급일 뿐만 아니라 간격의 문제와 연관된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자기 언급으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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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뒤로 두 사람은 특별한 대화도 시선 교환도 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는 부정적 선택을 통해 그와의 감정적 유대가 표현된다는 역설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달리 말해 쇼트-리버스쇼트가 아니라 시선 교환 없는, 그러니까 시선의 간격이 유지되는 투쇼트로 우정이 표현되는 것이다. 도노반이 에이블을 정면으로 보지 않는 것, 즉 간격의 시선을 선택한 것은 에이블의 초월적 간격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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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마주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철학적이면서 가장 영화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찍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마주 보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쇼트-리버스쇼트는 이 무능력을 위장하는 기법일 뿐이다. 스필버그는 간격들 앞에서 지금 영화의 능력과 한계를 숙고하고 있다. 영화가 건널 수 없는 다리를 숙고하며 그는 또 다른 간격들을 등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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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현실을 보고, 관객은 영화로 현실을 본다는 말은 거짓이다. 정면으로, 존재론적 격리 없이, 본 경험의 즉각적 무화 가능성 없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파이 브릿지>를 보고 모종의 현실을 본 것처럼 말해선 안 된다고, 스필버그는 지금 우리에게 집요하고도 간절하게 청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쇼트-리버스쇼트와 마찬가지로 영화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촬영규칙들 역시 무능력을 위장하는 기법들이다. 실제로 그것들은 인간의 눈이 속을 수 있는 만큼의 정도를 수많은 실험들을 통해 찾아낸 결과였고, 결국 리얼리즘이란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의 또다른 설명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기법들을 잘 사용해서 쇼트를 착실히 쌓아올린 영화를 보고 비겁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고전기의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그랬고 스필버그의 영화 역시 여전히 그 자장안에 놓여있다. 새로이 주목받는 미국의 작가들, 이를테면 베넷 밀러같은 감독도 그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영화들의 자기언급이란 언제나 영화 내부에 있었다. 동일한 평자의 존포드 이야기 연재 시리즈를 참고한다면, 고전적인 것과 모던한 것은 명확하게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고전영화들은 늘 모던함의 씨앗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 똑같은 기법과 똑같은 규율에서 출발해서 어떤 영화는 위대한 영화의 반열에 오르는가. 여기에 나는 비겁함이라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원래 비겁함을 간직한 매체다. 영화는 그 무엇보다 위장에 능하고 수많은 모순들을 덮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 아직까지 회자되는 소위 '위대한' 영화는 그 위장을 이해한, 그러니까 비겁하지 않으려 애쓴것이 아니라 비겁함을 알았기에 나빠지는 것을 멈춘 흔들림의 영화는 아닐까. 어쩌면 영화의 가능성이 더 정교한 현실성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없는 격차와 균열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영화 발전의 활로였을 것이다. 


여기까지였으면 이 생각은 굳이 이 유치한 형식의 글로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씨네21에는 한편의 비평이 실리게 된다. 송경원 기자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보고 쓴 '영화는 영화다'라는 제목의 평론이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보고 놀랐던 것은, 내가 영화를 보고 중요하게 생각했던 거의 모든 장면을 근거로 들고 있는데 결론은 정반대의 지점에서 맺어진다는 것이었다. 그 결론으로 가는 과정, 근거는 위의 글과 동일하다. 영화는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 속의 현실을 보고 현실을 본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영화가 관객들에게 그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것. 이 말은 매우 포괄적인 것이어서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고도 말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시카리오>의 방식은 명백히 비겁하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작한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애리조나 주에 위치한 마약 카르텔의 집 벽을 부수고 시체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방식은 매우 과시적이며 반복적으로 찍혀있다. 마치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을 보는 것 같다. 나는 이 장면이 매우 선언적으로 보였다. 앞으로 폭력을 전시할 것이고 관객들은 그것을 구경하게 될 것이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위 비평문에서 근거로 든 모든 장면들은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타당하다. 이 영화는 소용돌이 치는 혼란스럽고 불행한 현실을 안전한 프레임 안에 전시하고 있으니까. 관객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다. 케이트의 시점을 벗어난 멕시코 경찰 실비오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통해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관객의 자리에 대한, 영화와 현실의 간극을 상기시키는 균열이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안전하고 스펙터클한 관람이지 세계에 대한 다른 차원의 조망이 아니다. (이런 예시는 끝도 없이 댈 수 있을것이다. <곡성>, <사울의 아들> 등등등)


비겁함과 그렇지 않음의 차이. 개인적으로 <스파이 브릿지>와 <시카리오>가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점은 각각 자기언급과 자기증명에 있다. <스파이 브릿지>에서 도노반이 협상의 결과로 소련으로부터 데려와야 했던 군인 파워스는 소련 상공의 항공촬영이라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격추당해 억류되어있는 상태였다. 앞선 장면에서 임무를 설명받는 군인들은 비행기에 달린 카메라를 보고 만진다. 카메라는 당시 가장 최근까지의 기술적 발전의 결과물로 높은 해상도와 넓은 시야각을 자랑한다. 크고 매끈한 카메라는 고혹적인 매력마저 내뿜지만 어딘지 위험한 무기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바로 그 항공촬영은 <시카리오>의 국경사이를 잇고 케이트의 시선을 벗어나 종종 중립적이고 무심한 시선인것처럼 군다. 그러나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큰 권력의 시선이다. 피닉스 주 은행시퀀스의 CCTV화면에서도 나는 동일한 감정을 느꼈다. 요컨대 그것은 도취와 과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의 태도와 밀접하게 닿아있다. 영화로서의 자기를 언급하는 영화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온갖 현실의 불행과 존재하는 폭력적 시선을 이용하는 영화. 거칠고 단호하지만 지금 내게 두 영화는 이렇게 요약된다. 나는 <시카리오>를 보는 내내 현실의 불행과 그것의 거대한 원인을 영화로 만들어 보여주려 안달이 난 사람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국경을 넘어 사적인 복수까지 해낸 알레한드로의 온전한 그만의 장면들까지 보고나면 결국 영화의 최종 목적지가 이곳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비겁하게도, 이 영화는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크고 넒고 복잡한 세계가 있으며 나는 현실인척 위장하지 않고 영화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으니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한다. 비겁함의 가장 큰 함정은 자신이 비겁하지 않다고 말할수록 더 비겁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 그 반대편에는 민망한 솔직함이 있다. 현실의 다층적 폭력과 불행, 선과 뒤섞인 악에 자신이 매료되었고 그것을 탐구하기 위해서 위태로운 곳으로 간다고 말하는 대신, <시카리오>는 그곳에서 떨어져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할일이라는 애매하고 진실하지 못한 말을 반복함으로서 함정에 빠진다. 도취와 자기증명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순간이 오히려 이 영화의 진정으로 매력적이고 안쓰러운 순간이다. 


비겁함의 경계는 흐리다. 자기 자신에게 빠져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비겁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불행을 이용할 때, 타인의 용기에 무심하고 자신의 행동에는 관대할 때, 모순 위에 하나마나 한 말을 얹어 순간을 모면할 때, 상반된 듯이 보이는 양쪽의 태도를 폭력적으로 소급할 때 우리는 비겁하다는 말로 그 자리를 환기시킨다. 그러니 내게 비겁함은 위장과 관계되어 있다. 욕망을 숨긴 말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든다. 문제는 '숨긴다'는 행위가 완전히 자발적이고 완전히 의식적이지 않다는데에 있다. 욕망은 숨겨진다. 동시에 사람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니까 누구나 욕망이 숨겨진 삶을 사는 셈이다. 이때 비겁해지지 않는 방법은 '욕망'이 '숨겨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밖에 없다. 결국 세상은 온통 긍정으로만 사유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대신 '그렇다'고 말하는 것. 긍정의 활력으로 가득찬 '그렇다'가 아니라 진실과의 고단한 조우나 결과적인 체념으로서의 '그렇다'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에게 더 많이 필요한 것은 일종의 창피함을 무릅쓰고 '그렇다'고 말하는 비겁하지 않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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