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무(無)에서 만들어졌다는 교리는 우리에게 우주의 아찔한 우연성에 유의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모더니스트의 예술작품이 흔히 그러하듯이 우주도 자칫 창조되지 않았을 수 있으며, 생각 깊은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우주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의 그림자 속에 언제나 놓여 있다는 얘기다. ‘무(無)로부터의’ 창조는 하느님이 지독히 영리해서 기본적인 원자재 없이도 뭐든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증거가 아니라, 세상이 어떤 앞선 과정의 필연적 결과, 피할 수 없는 인과(因果) 사슬의 결말이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다. 어떤 형태로든 앞선 인과관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세상의 일부여야만 할 터이므로, 어떤 인과관계도 세상의 기원으로 여겨질 수 없다. 세상 곧 우주가 필연적인 게 아니기에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 추론해낼 수 없다. 그 대신,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관찰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과학의 역할이다. (p.20)


디치킨스가 빚지고 있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liberal humanism)의 유산에서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사랑은 디치킨스의 정치적 어휘에 포함되지 않으며, 그들이 혹시라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당혹스럽게만 느껴질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인간 실존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여기고 개인의 삶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자유주의 전통의 시각으로는 세상사에서 주변적 위치를 차지할 뿐이다. 예컨대 정치적 사랑이라는 개념은 디치킨스에게 별 의미가 없을 듯하다. 한데 사회주의에선 정치적 사랑이라 할 만한 것이 윤리의 근간이다. 문제는 사랑이 그저 성애와 로맨스, 개인과 가정의 일로 거의 완전히 축소되어 버린 사회에서 정치적 사랑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디치킨스가 지금과 같은 글들을 써내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랑의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와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전통이 오늘날 흔적도 없이 가라앉을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p.49)


이 정도면 충분히 자족적이며,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상태에 얼추 도달해 있고,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과거에 비하면 무척이나 발전하지 않았느냐고 자평하는 사회에서 믿음이나 희망이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까? 부족한 점이 전혀 없으며 지금의 것들이 지속되기만 하면 그만인 인류 역사의 정점에 와 있다고 적잖은 시민들이 생각하고 있는 서구 세계에서, 믿음이라는 게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역할 이외에 어떤 구실을 할 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처한 상황에 뭔가 크게 잘못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상황이 불합리할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참을 수 없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p.66)


더 생각해 보자. 종교가 그 주춧돌 같은 원칙들을 명백하게 저버렸다면 자유주의는 또 어떤가? 디치킨스가 열렬하게 옹호하는 중산층 자유주의, 계몽주의의 계보 말이다. 그것들 또한 스스로가 내세우는 훌륭한 원칙을 따르는 일에서 완벽함과는 적잖은 거리가 있지 않은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다른 나라들에게 전하겠다며 자행하는 폭력과 매수,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불러오는 비참,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탐욕스러운 역사, 빈곤과 기아의 유발, 엄청난 규모의 전쟁과 대량학살, 가증스러운 폭군들에 대한 비호와 무기지원 따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서구 세계가 자행한 학살과 억압의 긴 역사에 비하면, 서구 세계를 대상으로 벌어진 잔인한 테러가 지금가지 빚어낸 인명 피해는 사실 대수롭지 않은 편이다. 이런 일들의 미래가 어떤 모습을 띨지 우리는 짐작하기 힘들다. 그러나 아무리 의지가 굳은 테러리스트라도 서구 세계가 저지른 야만적인 전쟁과 제국주의의 기록에 필적하려면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릴 터이다. 이 세계의 부유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테러리즘이 써가는 새로운 서사에 의해 죽어갈 가능성 못지않게 자체 내의 분쟁 때문에 이 땅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p.85)


도킨스는 근본주의를 공격하면서도 세계화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그 같은 직설적 비판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의 토양이 되는 불안감과 굴욕감의 대부분을 만들어내는 게 바로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인데도 말이다. (p.91)


오늘날의 사상의 자유라든지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인도주의, 시민으로서 누리는 권리들, 공화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유산의 많은 부분이 계몽주의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계몽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보다도 피로 물든 자본주의 문화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도 이용됐다. 디치킨스가 왜 그런 점을 언급하지 않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겉보기에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알고 보면 하나인 연유는 오직 마르크스주의만이 말해 준다. 마르크스주의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위대한 업적뿐 아니라 베이컨이 고문을 정당하다고 믿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성이 피임법과 히로시마 원폭, 해방운동과 생물학전을 동시에 뜻한다고 역설한다. 유럽이 근대성의 역사적 본거지라고 말하는 건 유럽 중심적인 사고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앞의 주장엔 유럽이 홀로코스트의 현장이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음을 망각한 비판이다. 근대성이 긍정적인 현상이냐 부정적 현상이냐 하는 의문에 대해 급진주의는 단호하게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이라고 답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직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가끔 다른 이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데서 얻는 만족감을 제외하면- 디치킨스가 옹호하는 자유주의적 계몽주의가 인간 사회에 커다란 발전을 이룩한 동시에 끔직한 악몽까지 안겨주었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이론이 마르크스주의라는 점에 있다. 게다가 상충하는 이 두 역사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우연히 공존하게 된 게 아니라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까지 마르크스주의는 밝혀준다. (p.96)


보편성의 원칙은 한창때엔 그 누구든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권리가 있다는 뜻으로 쓰였지만, 이제는 서구 세계에만 보편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잖다. 국제주의의 원대한 비전은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개념에 의해 거의 쫓겨난 형국이 되어버렸다. 세계화는 자본이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절대적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 체제다. 또, 평등이란 다른 어떤 고결한 의미보다 시장에서 상대를 능가하거나 착취할 수 있는 고른 기회를 뜻하기에 이르렀다. 신화와 미신에 대한 상쾌한 비판은 과학지상주의로 변질되어, 실험실에서 만지작거릴 수 없는 것은 진지하게 여길 필요조차 없다고 여기는 지경이 돼버렸다. 그런가 하면 자기 스스로 생각할 용기를 가지라는 칸트의 명령은 전통이라는 자원에 대한 경멸과 무시, 권위란 본디 억압적이라고 보는 유아적 발상 따위로 왜곡돼 왔다. (p.99)


과학적 합리성은 과거의 것들에 대한 단순한 부정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획득한 새로운 형태의 자기 이해를 의미했다. 과학적 합리성은 자체의 존재론적이고 상징적인 틀에 의해 유지됐지 과거의 것에 대한 고집스러운 거부만으로 유지된 게 아니었다. 어떤 불멸의 보편적 합리성이 긴 어둠의 시기를 버티면서 때가 오기를 끈질기게 기다린 끝에 마침내 싸움을 시작해 자신을 덮고 있던 종교적 맹신이라는 쓰레기더미를 헤집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p.106)


이제 인간에 대한 새롭고 권위 있는 이미지가 탄생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로우며 지배적이고, 주체적이자 자율적이며, 위엄 있고 결코 무너지지 않으며, 책임감 있고 냉철하며, 관조적이어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공평무사한 존재다. 디치킨스가 이성이라 부르며 찬양하는 것은 바로 이 역사적으로 특수하고 도덕적으로 기구한 이미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는 인류가 드디어 성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임마누엘 칸트의 자유주의에서 장려하게 표현된 이 성숙함은 모종의 유아적 불안감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디치킨스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행위에서의 주체성과 사물에 대한 지배력, 그리고 자율성 등은 바람직한 미덕이지만, 위협적이리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주권은 고독과 불가분한 것임이 드러난다. 계몽정신으로 무장한 인간은 확신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이 우주에 홀로 서 있으며 그의 진가를 증명해줄 것도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는 세계를 지배한다면서도 거기에 개재된 자의성과 불확실성을 진저리 칠 정도로 의식하게 되며, 이런 상황은 근대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심각해진다. 자신이 한 손으로 방금 세상에 끼워 넣은 가치를 다른 손으로 끄집어내어 이것 보라며 제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 주체가 딛고 선 토대가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은 또 어떻게 봐야 하는가? (p.112)


자기도취에 빠진 계몽주의적 이성은 종교적 신앙의 본질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이성의 냉철한 분석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욕구와 갈망을 종교가 어떤 의미 체계로 수용하는지를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다. 이성은 종교를 우스꽝스러운 미신이자 유치한 비합리로만 간주했기 때문에 종교를 극복할 수가 없었다. 디치킨스 역시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 듯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종교에서 억압받는 인간들의 한숨을 들은 카를 마르크스는 이들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다. 종교는 이성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세계에서 시작된다. 이성이 합리성과는 무관한 관심과 욕망들 -사실 이성이 지닌 힘의 많은 부분이 여기서 길어 올려진 것인데-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이성은 보다 견실해져서 그 욕망들이 무법 상태로 치닫고 결국에는 이성 자체까지 압도하게 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합리적 논증의 수준에만 머무는 종교 비판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p.122)


그렇다고 서구의 제국주의가 사라지면 광신적인 이슬람주의자도 사라지리라는 뜻은 아니다. 광신적인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처럼 광신적 이슬람주의자도 언제나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보다는, ‘가자 지구’로 알려진 거대한 집단수용소가 없었다면 쌍둥이 빌딩이 여전히 우뚝 서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얘기다. 이슬람 급진주의에 이 정도의 합리성을 부여하는 일에조차 분개하면서 그것을 단지 정신병적 현상으로만 간주하려 드는 사람들에게는 몇 해 전까지 아일랜드 공화군을 감시했던 영국 정보국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권하고 싶다. 전문적 테러방지 요원인 이들은 테러리스트에 대해 매우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을 괴물이나 광분하는 야수로 해석하는 통속 언론의 멍청하고 이성 잃은 보도들을 우습게 생각한다. 그들은 IRA의 행동이 간혹 아주 잔인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좁은 의미에서는 합리적이며,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IRA를 이기기가 어렵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CIA도 납치와 고문과 살인을 숱하게 저지르고, 암살단을 지원하며 민주주의를 농락해 왔다는 점에서 테러조직이라 하기에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CIA 요원이 비합리적인 사람들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적을 정신병자로 몰아세우는 까닭은 우리 자신에겐 죄가 없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적 믿음을 이성의 정반대편에 놓는 한 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p.142)


이성이 우리의 궁극적 토대는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비합리주의에 굴복하지 않기는 프로이트주의자나 신학자뿐 아니라 정치적 급진주의자에게도 쉽지 않다. 이성은 그 자체보다 더 깊고 끈질기며 덜 허약한 내적 에너지와 자원에 기댈 수 있을 때에만 주도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 한데 안타깝게도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이러한 진실을 거의 간과해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이성이라는 문제를 만나게 되는데, 이는 결코 신학적인 주제에 그치지 않는다. (p.146)


데니스 터너에 따르면 아퀴나스에게 “합리성은 우리의 동물적 속성이 취하는 형태이며....우리에게 육신은 곧 지적 존재의 재료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일종의 유물론이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추론하는 까닭은 인간이라는 물질적 피조물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게 아니라 동물이기 ‘ 때문에’ 이성적이다. (p.169)


나 같은 사람들과 디치킨스의 차이는 결국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비극적 인본주의 차이로 귀착된다. 디치킨스류의 사람들은 우리가 신화와 미신의 해로운 유산을 떨쳐내기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런 주장 자체가 신화다. 너그러운 신화이긴 하더라도 말이다. 비극적 인본주의도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자유로운 번영을 염원하되, 그 같은 이상은 우리가 최악의 것들을 직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에 대한 긍정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으려면, 왕정복고 이후 미몽에서 깨어난 밀턴처럼 인간이 애당초 구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에서 거인국의 왕이 무슨 생각으로 인간을 구역질나는 해충이라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긍정이어야 한다. 비극적 인본주의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든 기독교나 정신분석학의 관점에 선 것이든 간에, 인간은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를 통해서만 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변화된 사회가 미래에 반드시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교조적 자유주의자, ‘진보’의 광신자들, 이슬람 공포증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이 변화의 길을 끈질기게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런 미래가 조금은 더 빨리 찾아올지 모른다. (p.216)

만식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