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핀처는 여전히 흥미롭게 거론되는 이름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조디악>을 뛰어넘는 그의 영화는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둘러싼 의견도 상당히 흥미로운데, <세븐>, <파이트 클럽>, <패닉룸>을 찍었던 데이비드 핀처와 확연히 다른 모습 때문인지 호불호가 많이 갈리기도 했다. 실제로 핀처는 빠르고 어두운 특유의 스타일이 있고 그런 특징들은 <조디악> 이후에도 여전히 데이비드 핀처다운 모습들로 남아있다. 그러나 어떤 감독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스타일을 벗어난 영화가 걸작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미국의 실존했던 연쇄살인범 조디악이 있다. 그는 암호와 상징을 통해 자신을 알렸고 이를 쫓아가는 신문사의 기자 폴 에이버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삽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 그리고 형사 데이브 토스키(마크 러팔로)가 있다. 이들은 오랜 시간 조디악을 추적했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가려냈지만 기소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연쇄살인을 저지른 조디악과 그를 쫓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인 셈이다. 이런 영화는 대개 사람들의 기대를 불러 모은다. 더구나 이 영화의 감독은 데이비드 핀처였다. 나는 무서움을 잘 느끼지 않는 편이지만 <세븐>은 충분히 공포스럽고 스릴있는 영화라고 생각했고, 이런 종류의 장점이 그리 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조디악>은 <세븐>이 될 수도 있었던 영화였다. 혹은 폴이 생활이 망가져가며 사건에서 떨어져나가고 데이브가 수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끈질기게 사건을 파헤쳤던 로버트의 모종의 끈기와 정의로움을 기대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핀처가 했던 것은 달랐다. <조디악>에는 서스펜스도 공포도 아닌 이상한 리듬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의 열쇠가 될지도 모르겠다.



<조디악>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 모두가 영화를 보고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이 영화는 느리다. 실제 사건이 무려 20여년간에 걸쳐있었기 때문일까? 그것만으로 답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조디악>은 퍼즐 맞추는 남자에 대한 영화다. 이 말의 방점은 모든 곳에 찍혀야 한다. ‘퍼즐’을 ‘맞추는’ ‘남자’. 그렇다고 왜 느린가. 중요한 것이 퍼즐의 맞춰짐이 아니라 그 퍼즐을 통과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용의자들이 나열되고 쫓고 쫓기는 가파른 호흡 끝에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면서 사람들의 운명을 바꿔놓는 퍼즐을 우리가 봐야한다고 말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베넷 밀러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폭스캐쳐>는 마크 러팔로가 <조디악>에서와 동일한 이름의 배역 즉 데이브로 등장하는 영화다. 이름 때문에 떠올리게 되었지만 두 영화는 조금 더 닮은 구석이 있다. 두 영화 모두 미국에서 일어난 실화를 다루고 있으며 그 특정한 시공간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불가능, 체념, 실패 등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두 영화를 가로지르는 단어가 있다면 모호함이 아닐까 싶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폭스캐쳐>와 <조디악>은 그런 질문을 함께 품고 있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조디악>은 <폭스캐쳐>가 그랬던 것처럼 그 일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인지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신 <조디악>이 궁금해하는 것은 ‘퍼즐’인데, 퍼즐을 맞추는 행위가 마치 영화와 같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도 보인다. 어쩌면 영화는 퍼즐을 맞추기에 적합한 매체가 아닐 수도 있다.


조금 끔찍한 말이지만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것은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기 때문에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그것을 풀고싶어한다. 실제로 조디악은 풀어야만 그 뜻을 알 수 있는 암호들을 신문사로 보냈고, 수사의 과정 역시 필체, 지문, 발자국과 같은 증거들을 조합해 용의자를 가리고 그 행적을 쫓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것들은 지금은 글로 나열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보이는 것이며 수사의 바탕을 이루는 사람들의 증언은 들리는 것이다. 증언을 하는 많은 장면 중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조디악이 자신의 패턴을 깨고 남성인 택시기사를 살해했을 때 그것을 목격했던 것은 맞은편 집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증언으로 최초 용의자의 인상착의는 ‘흑인’으로 묘사되었지만 이내 ‘백인’으로 정정되었다. 수사과정에서 흔히 빚어질 수 있는 혼선이지만 이러한 증언이 <조디악>이라는 영화 안에 들어있을 때는 조금 더 오래 생각해보게 된다. 보는 것에서 오는 불일치. 혹은 영화의 맨 마지막, 조디악의 총격에 살아남은 피해자는 22년이 지난 후 용의자들의 사진에서 범인을 지목한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말한다. “마치 이 사람처럼 얼굴이 동그랬죠.” 수사관은 혼란을 느낀다. “어떤 사진을 가리키신거죠?” “아뇨. 마치 이 사람처럼 얼굴이 동그랬다고요.” 이러한 말들은 굳이 그 자리에서 진행을 방해하며 일종의 멈춤과 모호함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영화 전체의 리듬을 이룬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영화다. 수사를 따라가던 영화는 불현 듯 극장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들이 보고 있는 것은 <더티 해리>로 인물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범인을 자기 방식으로 잡는’영화이다. 검색만 해본다면 보수주의자들의 두려움이 드러나있는 영화라는 설명을 손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조디악은 자신의 상징이 유명해지고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제작되기를 바란다. 끝내 제외됐으나 유력한 용의자 중 한명 (아니 두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었던 릭 마샬과 동료 본의 직업은 극장 영사기사 및 포스터 작화가로, 범죄를 기록한 필름이 있으며 무성영화 ‘위험한 게임’이 범행의 동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정황이 있다.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퍼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의 삶을 망쳐놓은 퍼즐의 자리에 나는 이상하게도 ‘영화’가 놓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일치와 불확실성과 시간차를 동력삼아 진실로 접근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주어진 재료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들이 끝까지 미끌어진다면, 끝내 퍼즐을 풀었다고 해도 여전히 흩어져있는 이미지-증거들은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한다면 그래도 우리는 퍼즐을 풀고 싶어할까. 적어도 로버트의 대답은 ‘그렇다’인 것 같다.


영화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유력한 두 용의자는 여러 정황증거들과 각자 매우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절대로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 한쪽이 범인이면 한쪽은 아닌 것이다. 릭 마샬과 본의 코앞까지 다가갔던 영화는 또다른 용의자이며 실제로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앨런으로 향하며 다시는 그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주요 용의자로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이 무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퍼즐을 맞추는 과정이었으며 영화에 긴장감과 이미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필수적인 장면들이었다.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맞추는 퍼즐인 것일까. 이러한 생각은 핀처의 다른 영화 <밀레니엄>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영화가 아니면 맞출 수 없는 퍼즐의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끝내 퍼즐을 맞추고도 남겨진 조각들이며 그것을 통과한 후 더 나쁜 방식으로 변화한 사람들의 삶이다. <조디악>을 보면서 나는 영화가 퍼즐같다고 느끼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과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한다. 끊임없이 미끌어져서 결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렇지만 ‘이미’ 살고 있으므로 우리가 피하지 말아야 할,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서의 영화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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