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는 분명히, 절대로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들을 완결된 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말에 가까운 단상들을 늘어놓되 어쨌든 '모아'놓기 위해서 영화라는 카테고리를 사용하려고 한다...


<반다의 방>을 보고 나와 하염없이 걸으면서, 왜 하스미 시게히코를 비롯하여 많은 영화 비평가들이 <반다의 방>그리고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를 21세기의 영화로, 21세기 영화의 시작으로 언급했을지 나름대로 짐작이 갔다. 21세기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의 세기이다. 특히 영화-카메라의 오만함이란 극에 달한 것이어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찍을 수 있고 (대상) 어떻게든 찍을 수 있다. (방법) (고 믿는다.) 예컨대 누군가에게 21세기의 영화란 <사울의 아들>일 수도, <아바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영화가 21세기의 영화라면 바로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영화가 내게는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로 그러니까 <반다의 방>으로 보였다. 또는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음의 다른 말은 하지 않음이다. 


- <반다의 방>의 오프닝


3시간 내내 리스본 폰타이냐스의 철거되는 마을과 방에서 마약을 하는 사람들을 응시하는 이 영화는 얼핏 그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다는 데에서 현대영화의 다른 모습인 것은 아닐까 '해석'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또는 '하층민'의 삶을 뚫어져라 본 나머지 삶의 긍정을 발견한다는 다소 믿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감상평을 남기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현재 나의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로 다가가는 여정에 있어서는 완전히 무용하게 느껴진다. 


나는 영화를 거꾸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행진하는 청춘>을 본 다음 (그보다 전에 만들어진) <반다의 방>을 보게 되었다. <행진하는 청춘>을 보러 들어갔던 날 나는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인지 들어가자 마자 졸기 시작해서 영화의 앞부분을 거의 다 날려먹었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떴을 때 화면에는 한줄기 빛이 있었다. 이제 빛과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언제고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날 내내 내가 본 것은 빛이었다.


그리고 <반다의 방>을 본 것이다.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 지 모르는 영화들이지만 빛을 보겠다고 생각하면 졸지 않을 수 있을꺼야, 그 빛을 봐야겠어, 라는 다짐으로 보기 시작했다. 무엇이든지 찍을 수 있는 21세기의 영화. <반다의 방>은 카메라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엄격한 영화이며 인물의 내면에 동화되어 손쉬운 눈물을 허락하는 종류의 영화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와 방을 비추는 빛은 그것이 일렁인다는 사실 만으로도 화면을 활력에 가득차게 했다. 적어도 내가 본 <반다의 방>은 무시무시한 엄격함과 믿을 수 없는 이미지의 활력이 서로를 지탱한 영화였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물의 존엄과 연결됐다. 대상의 어떤 것도 착취하지 않고 존엄하게 찍을 수 있을까? 답을 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어야 하지만 적어도 <반다의 방>은 그 물음자체보다 멀리 나아간 영화이다. 


지타가 비스듬하게 기대서 바나나를 먹는 그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 반다의 방에 찾아온 친구와 성별간의 관계를 넘어선 우정과 유대를 확인하는 소박한 장면이, 무엇보다 반다의 기침소리가 이 인물들을 결코 잊을 수 없게 한다. 




페드로 코스타의 또다른 영화인, 잔느 발리바르가 노래하고 공연하는 모습들을 모아 만든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라는 영화도 아주 인상깊게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딸이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간 측면도 있었지만 다시 불이 꺼지고 빛이 하나 둘 씩 살아날 때는 이미 영화를 보기로 한 목적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에도 빛. 또다시 빛이었다. 특히 녹음하는 발리바르를 창문을 등지고 찍은 컷과 창문을 바라보며 그녀를 찍은 컷이 병렬될 때의 아름다움 같은 것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그대로 기절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해보았다. 



이렇게 발리바르가 노래하고 연습하고 공연하는 장면들만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그 기분좋음 때문에 쉬어가는 단계라고 생각하게도 되지만 이러한 작업방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반다의 방>을 비롯한 다른 그의 영화들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되었다. 페드로 코스타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다니엘 위예 부부의 영화(와 그 작업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는데 아무래도 그것을 이해하는 열쇠는 유물론적 태도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들에게 물성이란 이미지의 시간성과 물리적 길이 즉 숏의 지속시간과 필름의 물질적 생산관계였다. 페드로 코스타는 더이상 필름으로 작업하는 감독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원래 표면을 찍는 예술이라고. 표면밖에 찍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문제가 느껴진다면 이렇게 바꿔말해보는 건 어떨까. 표면을 찍어야만 시작할 수 있다. 이미지와 움직임을 찍은 표면들의 연쇄. 그 작동방식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로서는 무리이지만 그것이 향하는 곳이 인물이라는 것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당신의 숨겨진 미소는 어디에?'의 마지막 장면
- '당신의 숨겨진 미소는 어디에?'의 마지막 장면

스트라우브-위예를 찍은 다큐멘터리 <당신의 숨겨진 미소는 어디에?>에서도 마찬가지다. 평생 함께 영화를 만들어온 동지이자 부부인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가 영화 '시칠리아'를 찍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는 필름을 보며 프레임의 어느 부분을 끊고 다시 이어 붙일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을 필름과 함께 표면에 '상영'한다. 또한 필름의 특성-그것이 빛과 직접 만날 수는 없다는 것-에 의해 편집실의 어둠과 문 밖의 빛이 영화 만들기의 신비로우면서도 물질적인 측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영화만들기에 대한 영화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페드로 코스타의 모든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인물이 빛과 어둠 속에 서있으며, 스트라우브와 위예의 단호하면서도 정감있는 모습,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엄격한 의견의 교환, 특히 위예가 먼저 자리를 떠난 뒤 극장 밖 계단에 앉아있는 스트라우브의 모습은 (다니엘 위예가 세상을 떠난) 지금 영화를 보는 나에게 신기하고 먹먹한 감흥이 된다. 


주워들은 것들을 엮어 21세기 영화라느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어쨌든 지금 나에게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는 어떤 단단한 표면을 가진 물질의 영화여서 그 어떤 영화보다 견고하고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주는 영화다. 확신이라고 썼다가 믿음으로 고쳐 썼다. 확신 없는 믿음. 존엄한 인간. 위대한 형식. 더 나빠지지 않으려는 안간힘. 나에게 영화는 그런 것일까? 그런 것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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