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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인류의 생의학적 전형이라고 여겨지는 기준에 기대 보는 것도 이런 질문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생의학적으로 동일한 사람들이 다른 개인능력을 갖는 경우도 있고, 같은 개인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생의학적으로는 서로 다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안경, 보청기, 좋은 의수義手 및 기타 의학기술 물품은 어떤 사람들의 능력을 극대화한다. 반면에 신체적으로 같은 조건이지만 그런 의학기술에 접근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능력이 부족해진다. 도수가 높고 완벽하게 시력을 교정해 주는 렌즈를 낀 사람은 눈이 좋아서 교정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시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혹은 이들의 시력을 생의학적으로 같다고 말할 것인가? 물론 한 사람이 장애가 있는지를 물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생물학적 특성이 인간의 전형적인 특성인가 아닌가만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애먼슨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지적한 대로 비전형적이고 심지어 병리적인 생물학적 상태가 반드시 장애를 갖게 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항상 기본 능력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능력이 기본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어떤 능력이 정상적인가라는 물음과 마찬가지로, 상당 부분 그 능력이 발휘되는 사회환경에 달려 있다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p.48)

 

내가 UN 정의에 대해 비판하는 다른 부분은 “핸디캡”을 정의한 방식에 대한 것이다. 이 정의는 “나이, 성별, 사회문화적 요인에 맞는 정상적인 역할”을 언급한다. 이 때문에 여성의 “정상적” 역할에 해당하지 않는 일이라면, 어떤 여성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장애가 있기는 하지만 핸디캡은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정의에 따를 때, 예를 들어 그 사회에서 글을 읽는 것이 여성의 역할 중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맹인 여성이 점자로 교육받지 못하거나 활자 자료를 대신할 좋은 매체를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 지원의 부족으로 핸디캡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사회·문화 생활 참여에 대한 기대치가 남성보다 상당히 낮은 경우 장애여성의 기회는 심각하게 제한될 것이다. UN은 이러한 장애의 정의 때문에 많은 장애여성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대해 비판하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여성의 장애는 종종 잘 인식되지 않고 여성의 재활은 최소한으로 이루어진다. 여성들은 집안일만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으면 된다고 기대받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여성의 무임 가사노동과 자원활동이 공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데다가, 많은 곳에서 장애라는 것을 여전히 돈을 벌 능력이 없는 것으로 정의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전통적인 무임 노동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장애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p.50)

 

장애를 어떻게 정의하고 누가 장애인으로 인식될 것인지의 문제는 또한 한 사회가 몸을 다루는 태도와 몸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드러낸다. 사회가 어떤 외모나 신체 기능을 낙인 찍는지 또는 ‘정상’이라 간주하는지, 누군가에게 어떤 활동이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지, 성별이나 나이, 인종, 신분, 계급에 대해 어떤 가정을 하고 있는지 등을 드러내는 것이다.

(p.76)

 

나는 질병, 상해, 신체 기능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일으키는 사회 조건들에 의해, 또한 정상성에 대한 표준을 만들고 이 표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의 완전한 사회 참여를 막는 미묘한 문화적 요소를 아우르는 것들에 의해 장애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p.79)

 

공적인 세계와 사적인 세계가 분리되어 있을 때, 여성(그리고 아동) 대부분이 사적 영역으로 내몰려 온 것과 마찬가지로 장애인, 아픈 사람들, 노인들 역시 그러했다. 공적 세계는 힘의 세계이자 긍정적인(가치 있는) 육체의 세계이며, 성과와 생산성의 세계이고, 젊고 성인인 비장애인의 세계이다. 취약함과 질병, 휴식과 회복,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정적인(가치 없는) 몸은 보통 사적인 세계에 숨어 있으며 장치된다. 질병과 통증이 있거나 가치 없는 몸을 가진 사람은 공적 세계 안에 들어갈 때, 두 세계가 섞이는 것에 대한 저항을 마주하게 되고, 두 세계의 균열은 생생하게 드러날 것이다. 장애와 질병을 가진 사람이 겪는 경험 대부분이 지하로 숨어 들어가는데, 장애와 질병의 경험을 표현하거나 신체 및 정신적 경험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적 세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경험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가 장애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장애인이 사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고 생각할수록,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공적 영역에 접근할 수 없게 됨으로써 사회는 더 많은 장애를 만들어낸다.

(p.87)

 

론 애먼슨이 지적했듯이, 이론가들이나 여러 사람들은 접근권이 시민권의 성격으로 제공될 경우,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자원을 “사회적으로 강탈할” 가능성에 대해 염려하는 경향이 있다. 장애인에게 어떤 자원을 제공하자는 제안은 어쩔 수 없이 비용과 혜택, 자원의 고갈 가능성에 대한 염려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염려는 장애인을 위한 지원 덕분에 많은 부분들에서 전체 비용이 삭감될 것이라는 점을 대부분이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장애를 개인이나 가족의 책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장애인을 위한 공공의 지원이 능력과 생산성을 위한 사회적 투자가 아니라 순전히 자선행위라고 오랫동안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p.106)

 

나는 지금까지 독립이나 통합이 아니라 접근성과 능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독립이나 통합 모두 장애인들에게 언제나 적절한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항상 보살피는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를테면 농인들 같은 일부 장애인들은 비장애사회에 통합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분리된 사회생활을 선호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노동을 하고, 사회의 다른 이들에게 허용된 공적이고 사적인 모든 범위의 활동에 참여하는 기회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p.115)

 

‘장애인 영웅’the disabled heroes이라고 불리는 어떤 장애인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영웅적인 통제력을 상징한다. 그런 사람들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몸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재확인시켜 주면서 비장애인을 편안하게 해준다. 장애인 영웅은 쉽게 눈에 띄는 장애를 가졌으며, 비장애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을 해내기 때문에 대중에게 알려진 사람을 말한다. 거의 예외 없이(헬렌 켈러나 최근에는 스티븐 호킹이 예외에 속한다), 장애인 영웅들이 신체적인 힘과 끈기를 요하는 업적을 보여 줌으로써 알려지게 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장애인 영웅이 장애인에게 힘을 주고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이들은 비장애인에게 장애는 누구나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 준다. 장애인 영웅은 주로 대부분의 장애인이 가지지 못한 사회적·경제적·신체적 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신체적으로 영웅적인 행위를 보여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장애가 단순히 어떤 신체적인 활동에 제약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힘과 에너지를 많이 소모시키거나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장애인 영웅의 이미지는 몇몇 장애인의 타자성을 줄일 수는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장애인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결국 대다수 장애인의 타자성을 증가시킨다.

(p.129)

 

나는 자신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한계를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경험을 통해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장애인과 쉽게 동일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장애인을 타자로 생각하고 대우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장애의 범주를 너무 확장시켜서 장애인이 경험하는 타자화를 가볍게 치부해 버리는 시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모두가 한계와 불완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장애인이라는 말이 그런 예이다. 이 말은 타자화되는 것 이외에도 신체와 정신적인 조건 때문에 그리고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걸림돌 때문에 한계와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p.133)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로 어떤 의제에 대해 특정한 관점을 갖게 되거나, 왜곡이 덜하고 보다 완전한 관점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퍼트리샤 힐 콜린스의 가르침에 따라 나는 장애를 가졌다는 것이 보통 그 개인에게 비장애인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여성이라는 것이 대개 여성이 아닌 사람,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과는 다른 경험을 하도록 하고, 이 다른 경험이 특정한 의제에 관해 인식론적으로 이점이 있는 새로운 관점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모든 장애인이나 모든 장애 여성이 같은 인식론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들이 스스로의 경험에 대해 같은 해석을 하거나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우리가 비슷한 점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의 생각을 많이 듣고 읽어 본 결과,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여기서 나는 인식론적 의제에 대한 콜린스의 경험론적 접근을 따르고 있다). 우리가 비장애인들과는 다른 입장(들)을 갖고 있고, 상당한 정도의 지식을 축적해 왔으며, 이 지식은 비장애인 문화에서 무시되고 억압되어 온 것이지만 앞으로 더욱 발전되고 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p.146)

 

태아에게 나타날 수 있는 잠재적 장애를 출산 전에 감별하고, 후손에게 생길 수 있는 잠재적인 장애에 대한 유전학적 ‘진단’을 제공하는 의학적 기술과 관련해 실질적으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6장에서 이 주제를 낙태에 대한 여성주의 윤리학과 관련해서 다시 논의하겠지만 장애인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 장애에 대한 공포, 장애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현상이라고 보는 전제가 장애를 예방하려는 욕망에 기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장애를 예방하려는 욕망은 사회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규준’에서 벗어나는 차이를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장애를 차이로서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들은 장애인이 태어나는 것을 막음으로써 장애를 예방하려는 시도들을 남아선호사상에 따라 남자아이의 출생을 보장하려는 것이나, 유전적 기술을 이용해 피부색의 차이를 없애려는 것과 같다고 본다.

(p.161)

 

장애의 모든 생물학적 원인(사회적 원인에 반대되는 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당연시하는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나보다 잘 알고 있다고 매우 자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노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동기가 고통을 덜어 주고 예방하려는 것이라고 해도 고통 이외에 우리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들은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 장애인이 가진 차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언제 멈출 것인지 결정하도록 결코 맡길 수 없다. 더욱이 장애의 생물학적 원인을 없앤다는 약속은 곧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장애에 대한 문화중립적이고 생의학적인 정의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며, 이는 장애가 신체적·정신적 차이로부터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흐려 버린다.

(p.164)

 

신체적 정상성에 대한 기준을 건강, 외모, 몸의 수행능력에 대한 이상ideals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을 쉽지 않다. 여성적인 몸의 이상형과 여성성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구별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정상성의(의학적 ‘정상성’이 아니다. 이것은 다른 개념이다) 범위가 문화적으로 이상적인 몸에 대한 범위보다 상당히 넓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상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두 가지, 정상성과 이상형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신체적 건강, 외모, 수행능력에 대한 이상에 도달하기 어려울 때, 정상성에 대한 사회적 기준에 도달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자존감을 지키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기준 이하로 내려갈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더욱 두렵게 한다. 게다가 많은 이들은 ‘정상적인’ 범위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이 이상형에 맞추도록 계속해서 압력을 받고 부추김을 당할 때 특히 그러하다. 사람들은 문화적 이상형을 추구하면서 정상성의 기준을 높이게 된다.

(p.173)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몸을 이상화하고 대상화하는 것을 착취와 소외의 근원이라고 보고, 이를 비판해 왔다. 여성주의자들은 특히 외모, 차림새, 여성다운 행동거지에 대한 이상형 및 여성의 몸에 대한 성적이고 의학적인 대상화에 초점을 맞춰 왔다. 하지만 여성주의 운동은 종종 여성의 강점을 주장했는데, 이때 많은 여성들의 몸이 강하지 않다는 것을 간과함으로써 몸에 대한 스스로의 이상화를 드러냈다. 우리들은 기쁨, 만족, 연결된 느낌을 주는, 여성의 몸이 가진 경험들을 기념해 왔다. 하지만 우리들은 사회적 정의로 막거나 완화시킬 수 없는 몸의 좌절과 괴로움에 대해서 과소평가해 왔다. 또한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들의 통제를 비판하고 무효화하려고 했다. 여성들이 스스로의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유지한 채로 말이다.

(p.179)

 

의학계가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에 참여하는 이런 경향과 관련된 다른 현상들을 의사들의 성격이나 사회화된 태도의 탓으로 돌리기는 너무 쉬울 것이다. 의사들은 의학계에서 영웅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영웅적인 통제력을 추구한다. 그들은 영웅으로서의 역할을 즐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도 의사들이 그런 역할을 맡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을 계속 그 자리에 머물도록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군가가 언제나 우리의 몸을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의사가 아닌 우리들이 이런 환상을 유지하게 되는 것은 몸, 죽음이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나 대부분 의료적인 문제가 되었고, 우리에게 숨겨진 채로 의료 제도에 의해 ‘관리되기’ 때문이다. 1949년에는 미국인의 50%가 병원에서 죽었지만 이제는 80%에 이른다.

(p.184)

 

우리는 서양의학이 예방법과 완치법만을 추구함으로써 많은 고통을 예방하고 덜어 주기도 했지만 또한 많은 고통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장애를 경험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의학계가 환자들의 경험의 질을 높이고, 치료할 수 없는 신체적 한계와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병을 가진 사람들이 삶을 잘 마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자원을 쏟도록 요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의 경험과 지식을 주류 문화 속에 통합시키고 평범한 삶의 개념에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언제나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고, 그들에게 불가능한 일을 해내도록 하는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몸으로 사는 삶의 현실을 좀더 기꺼이 마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p.213)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일어나야 하는 일을 설명하는 의학의 권위는 몸이 경험하는 과정에 대한 의학적 관리도 정당화한다. 의학적 관리는 몸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통제하고 조정함으로써 사람들을 자신의 몸에서 소외시킨다. 예를 들어, 로비 퓨퍼 칸Robbie Pfeufer Kahn과 멕 폭스Meg Fox는 병원 분만실의 운영방식을 지적했다. 그들은 의학적인 관리체계가 출산 경험을 정해진 시간에 따라 순서대로 일어나는 기계적 과정으로 만들면서 많은 변수를 줄인다고 주장했다. 예정된 시간에 분만을 하지 못하는 여성은 보통 약을 처방받거나 수술을 받는다. 반면, 진통이 불규칙한 여성의 경우, “의료진이 손쓸 새도 없이 출산이 빨리 진행된다. 자궁이 쉴 새 없이 수축되면서 그 리듬이 분만시간을 기록하는 일을 대신하게 된다. 계속해서 뛰는 심장박동과 영원같이 느껴지는 몸의 시간 속에서 객관적인 시계의 시간은 사라진다”.

(p.228)

 

제프리스의 이러한 관찰은 현대 의학이 환자를 인식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문제를 일부분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의료 종사자 개개인이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의료과학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환자가 상상하거나 아픈 척한다는 것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 환자의 증상이 실제로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의학적 권위를 가진 많은 사람에게는 “당신이 아프다는 건(혹은 어지럽다거나 구역질이 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 이유는 모르겠어요”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나 자기 확신 혹은 겸손함이 부족한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순전히 의사들 개인의 성격 문제 때문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의학은 풀지 못하는 과제가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거의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과학이다. 그 과제란 의학이 거의 모르거나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한 중요한 물음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천문학자와 물리학자, 모든 종류의 비非의학 생물학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알려지지 않았거나 비교적 탐구되지 않은 영역에 대해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말하는 걸 볼 수 있다. 의료 과학자들이 대중에게 자신의 일을 드러낼 때는 하나같이 전혀 다른 담론을 구사하는데, 바로 질병이라는 적과 대결하는 영웅적 과학자라는 담론이다. 의학의 실패는 질병이 순간적으로 더 강력했던 것으로 추정될 뿐, 과학이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되는 적은 거의 없다.

(p.242)

 

18세기 초 독일 아이제나흐 지역의 한 의사는 1,800명 이상의 여성 환자들의 증상과 그들을 진단하고 치료한 내용을 기록했다. 그 의사의 기록을 연구한 바바라 두덴은 “통증을 언어로 표현하고 고통을 말로 얘기한다는 것은 역사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통증을 견딜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문화적 성취이다”라고 언급한다. 두덴은 의사 요하네스 스토흐Johannes Storch가 맡은 환자들이 질병에 대해 호소한 내용을 수집하여 정리된 목록을 만들었는데, 이는 통증을 표현하는 언어가 가지는 역사적 특수성을 잘 보여 주는 증거이다.

(p.256)

 

의학이 ‘과학적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통제의 환상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의학은 종종 환자의 요구와 충돌을 일으킨다. 의료 종사자들은 환자 몸의 ‘객관적’ 상태로 자신들의 성공을 측정하며 죽음을 가장 커다란 실패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 환자는 자신들의 주관적 경험으로 치료자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고, 절망적이거나 의미를 찾을 수 없거나 지지받을 수 없거나 인정받을 수 없는 고통의 사례를 의학의 가장 커다란 실패로 여길 가능성이 더 크다. 클라인만은 이렇게 환자의 요구와 충돌하는 것을 줄이도록 의학교육이 완전히 재구성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눌런드는 “오로지 아픈 이웃을 돌보기를 원하는 젊은 의학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생의학의 문제 해결사로 변신하게 되는 미세한 변화 과정”을 묘사한다. 불행하게도 의학계의 최고의 위치에서 인지적·사회적 권위를 얻은 사람은 보통 ‘객관적’, ‘과학적’ 시각과 가장 가깝게 동일시하는 사람이지, 환자의 관점을 가장 가깝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p.258)

 

제니 모리스는 비장애세계에서 독립을 이해하는 바에 따라 만들어진 몇 가지 환상을 지적한다. 산업화된 사회에서 살고 잇는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은 “일상생활 활동”activities of daily living[장애평가에 이용되는 용어]이라고 불리는 것들, 즉 씻기, 옷 입기, 요리하기, 쇼핑하기, 청소, 글씨 쓰기 등의 활동을 스스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을 독립의 필요 조건이라고 믿으며 따라서 장애인들이 이를 하지 못할 때 의존적이라고 본다. 이때 비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서비스에 의존하는 것, 예를 들어 수도꼭지를 통해 나오는 물에 의존하는 것 때문에 자신의 ‘독립성’에 장애가 있다고 인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강에서 물을 길어 오는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존하기보다, 수도꼭지로 물을 내보내는 수도기술에 의존할 수 있는 사회 제반 시설과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장애인이 가진 의존성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기술과 서비스를 발전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독립성”도 분명히 “장애”와 마찬가지로 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그 활동들을 하는지에 대한 기대에 따라 정의된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수도에서 나오는 물을 제공받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의존한다고 해서, 난방을 하고 불을 밝히고 컴퓨터를 작동하고 세탁을 하는 데 필요한 전기를 얻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의존한다고 해서, 음식과 옷을 직접 만들지 않고 시장에서 산다고 해서 나를 ‘의존적’이라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정원에서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해서 정원사에게 의존해야 하고 집 청소를 하기 위해 청소 서비스에 의존해야 하는 것 때문에 나를 ‘의존적’인 사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서비스는 자신이 이런 것을 직접 하지 못해도 스스로를 ‘독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많이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데도 내가 침대에서 일어날 때, 화장실 갈 때, 목욕할 때, 옷 입을 때, 밥 먹을 때, 이 닦을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사람들은 내가 매우 ‘의존적’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누가 ‘독립적’인 사람인가에 관련한 우리의 생각이 철학적으로 임의적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심리적으로는 그것이 임의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성인들이 유아기에 필요로 했던 신체적인 도움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듯하다. 아마도 우리가 아이들을 좀더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그것을 표현한다면 아이들과 성인들을 구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물, 음식, 보금자리, 옷을 자신이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봤을 때, 산업화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모두는 갓난아기처럼 무능력해 보이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 장애가 없는 기혼남성이 보통 쇼핑, 요리, 집 청소, 정원 관리를 해보지 않았고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경우에도 ‘의존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 유급 노동을 하지 않는 비장애 기혼여성은 ‘의존적’이라고 여겨진다. 메러디스 킴볼은 특권이 있는 상류층 사람들이 제공받는 도움은 이들을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독립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p.272)

 

“장애인의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하는 널리 퍼져 있는 전제”가 낙태, 안락사, 의료개혁을 이론화하는 데 핵심을 이룬다. 이런 전제가 장애인들의 복지와 안정, 사회적 수용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의학적 치료를 집중적으로 받은 경험이 있고 의학의 한계를 아는 장애인들은 생명의 윤리학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죽음을 선택할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도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장애운동가들은 장애인의 선택과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높이기를 원하면서도, 개인의 ‘선택권’과 ‘선택지’(낙태하거나 죽거나 치료를 선택하는 것)가 장애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강력한 사회적 편견과 합쳐졌을 때, 그것이 선택이 아닌 사회적인 의무사항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장애여성의 관점을 포함하는 여성주의 윤리학은 낙태, 안락사, 의료개혁에 대한 입장 중 어떤 것이 장애인의 삶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과 함께 갈 수 있는지를 반드시 고려하여야 한다.

(p.283)

 

장애가 있는 신생아를 죽이거나 방치함으로써 죽게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해 장애운동가들은 정당하지 않은 살인이라며 널리 비판해 왔다. 이 살인은 단순히 장애를 가진 삶이 살 가치가 없다는 전제가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때문에 안락사로 여겨지는 것이다. 많은 장애운동가들이 장애신생아와 같은 종류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닌 그 누구도 이들의 삶이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할 도덕적 지위에 있지 않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내 경험에서 봤을 때 (여성주의자를 포함한) 비장애여성들에게는 산모가 장애신생아의 의료적 살해를 요구할 힘을 가져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여전히 보편적이다. 분명히 이 주제는 신생아를 살해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 장애를 비하하지 않는 여성주의 윤리학자들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

 

주)나는 이 문제가 열려 있는 도덕적 문제라고 본다. 왜냐하면 어떤 아기들은 매우 고통스럽고 결국 단기간 안에 죽을 수밖에 없거나 너무나 쇠약하여 죽음보다 나은 삶을 살 어떤 합리적인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중증의 진행성 장애와 통증이 심한 장애를 가진 성인들이 적어도 이런 사례들의 경우에 자문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런 상황에서 이 아기를 죽도록 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책임을 가지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p.294)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몸으로부터의 소외를 줄이는 것, 몸을 더 잘 인식하는 것, 몸의 힘과 쾌락을 찬양하는 것만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고통받는 몸, 도통 없이는 인식되지 않는 몸, 또한 상반되는 감정 없이 단순하게 찬양하기 힘든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p.330)


* 포스트의 제목은 '장애여성공감' 창립 20주년 기념 슬로건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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