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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ing the Whore

멜리사 지라 그랜트, [Sex Work - 성노동의 정치경제학]

성노동자들이 맞닥뜨린 낙인과 폭력은 성노동 자체보다 훨씬 더 해롭다. 그러나 이 점은 성매매 자체를 폭력이 폭력을 낳는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성매매는 여성과 남성에게 허용되는 최대치가 어디까지이며 어디에서부터 권리가 사라지고 폭력이 정의가 되는지를 나타내는 표식이다. 이것은 가장 보호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이들을 위한 보호비용으로 받아들여진다. 성노동 반대론자들은 성매매가 폭력적인 제도라고 비난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행사되는 폭력은 허용하고 있다.

파고 비디오는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성노동자들에게 행해지는 이 폭력을 목격하게 만들면서도 우리가 이런 식으로 성노동자들의 존재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이 비디오들을 통해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성노동자들이 이동하고, 생계를 꾸리고,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능력을 통제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인 경찰의 술책과 이로 말미암아 그 마지막 몇 분 동안 이 사람들이 어떻게 비디오 영상 안에서 전시되는지를 보며 그것만을 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길 것이다. 이 비디오들은 그 순간, 다시 말해 합의가 이뤄지고 돈이 교환되는 그 순간을 잡아내고 중계하는데, 이 장면이 무엇이 성매매인지를 보여준다고 여겨진다.

(p.33)

 

사람들은 성노동자들과 성노동자라고 여겨지는 이들은 누구나 항상 일을 하고 있다고 믿으며 경찰의 눈에 이들은 항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경찰이 성노동자 목록에 올려놓은 사람들 중에는 성전환 여성들, 유색인 여성들, 퀴어와 외모나 행동 면 등에서 기존의 성별 규범을 따르지 않는 청소년의 수가 불균형적으로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성을 단속하려는 게 아니라 섹슈얼리티와 젠더가 의심스럽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단속하려는 것임을 말해준다.

(p.35)

 

우리가 성노동자를 그 혹은 그녀의 일로만 보거나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볼 때 우리 또한 경찰의 눈을 갖게 된다. 그것은 교도소의 눈일 뿐만 아니라 성적인 눈이다. 성노동자가 항상 일하고 있다면, 항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태에 있다면, (이런 눈으로 보는) 그녀는 (거의 항상) 본질적으로 성적이다. 그것은 호텔방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의 눈 혹은 우리 이웃, 공동체 성원, 경찰에 적용된다. 심지어 성노동자들에게 가장 호의적으로 보이는 소위 ‘사회복귀’ 프로그램도 성노동자들을 나머지 인구로부터 격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곳은 쉼터라 불리지만 문은 잠겨 있고 전화는 감시당하며 손님의 방문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도움이랍시고 이런 것들을 구축할 때 우리의 시각은 감옥을 짓고 그 감옥에 범죄자들을 채울 때의 시각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다. 자선도 아니다. 그것은 통제다.

(p38)

 

매춘부라는 인격체가 만들어진 시기는 바로 19세기였다. 매춘부는 매매춘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에서 탄생한 제도의 산물이며 우리는 그 점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인류학자 로라 오거스틴Laura Agustin은 『주변부의 성Sex at the margins』에서 이 시기 이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적 서비스 판매를 특정해 일컫는 용어나 개념은 없었다. …… ‘창녀짓whoring'은 혼인관계 밖에서 이뤄지는 성적 관계를 일컫는 것이었고, 돈은 개입되지 않은 부도덕함 혹은 성적 문란을 내포하는 말이었다. '창녀'라는 용어는 어떤 여성이든 당대에 존중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경계를 벗어날 때 그 여성에게 꼬리표를 붙이기 위해 쓰인 용어였다.

 

매춘부의 특성이 발명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여성을 보는 동시에 새로운 종류의 남성인 동성애자의 발명을 보게 된다. 그러나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성적 관계가 이 시기에 구성된 동성애자라는 정체성보다 먼저 존재했듯, 매춘부라는 정체성 역시 이미 상당히 오래된 일련의 성적 관습에 적용된 것이었다. 둘의 목적은 같은 선상에 있었는데, 즉 행동(그것이 얼마나 간헐적인 것인지는 상관없이)을 정체성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일종의 인격체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오늘날 쉽게 상상되고 설명되고, 또한 쉽게 취급되고 법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하나의 계급표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계급은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손상되어 거의 복구가 불가능한 존재로 상상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이를 통해 소수의 고귀한 이들을 구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상상된 특징을 갖게 되었다.

(p.46)

 

성노동 이전에 이야기된 매춘부와 창녀에 대해 참조하지 않고서 성노동의 정치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이 용어들에 붙어 있는 특징이야말로 매춘부라는 상상물을 퍼뜨린 주범이다. 이 점은 성노동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여성은 아님에도 왜 성노동의 정치학이 끈덕지게도 여성문제라는 틀 안에서 논의되는지를 설명해준다. 남성들은 그저 포주나 고객으로 존재하거나 그게 아닌 경우에는 구매나 - 아마 성노동자들이 이 용어를 선호하기 때문에 - 로 존재한다. 이는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덜 문제적이라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성거래 안에 있는 여성들은 남성의 욕망이나 폭력의 대상으로서 상상되고 재현된다. 그리고 성거래 안에서 일하는 남성들이 같은 직종의 구성원으로 간주되는 경우는 드물다.

성을 파는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미디어에서 매우 전형적으로 재현되며 성거래업에 있는 다른 여성들과 관계하는 호의에 찬 사회활동가들에게조차 잘 이해받지 못한다. 오랫동안 성산업 안에 비규범적 젠더가 있어왔고, 성산업은 다른 직종에서 차별에 직면한 이들에게 가장 의지할 만한 소득원이 되어왔다. 그렇지만 성거래 안에서 규범적 젠더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성노동 현장 밖에 있는 이들에게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p.51)

 

이것은 훔쳐보기 쇼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예를 들어 여기서 내가 하는 이야기에 이르게 된 것이 성노동자로서의 내 경험과 떼어놓을 수 없더라도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독자를 야릇한 상상으로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교환하는 것이고 동시에 내가 이 게임에서 잃을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간과하지 않으면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 이처럼 선택적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일시적이면서 궁극적으로는 불충분한 저항방식이다. 내가 내 이야기를 합법적으로 나눌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여전히 성노동을 할 나와 다른 이들에게 경제적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혹은 그때가 올 수 있게 만들 때까지 내가 택할 전술인 것이다.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또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성노동자들에게 향해 있는 당신의 시선을 성노동을 근절하거나 통제하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이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매춘에 대한 상상 쪽으로 옮겨놓고자 한다.

(p.72)

 

해를 입지 않고 성노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기 위해 성노동자들이 성노동의 존재를 비호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생계를 위해 일하는 대다수, 그렇게 말하는 게 지나치다면 적어도 그중 상당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갖는 태도가 일하는 동안에도 변하며 심지어 하루 동안에도 변하기 마련이다. 성노동자들의 경험을 착취당하거나 아니면 힘을 얻거나 하는 한쪽 면에만 가둔 채 그들의 경험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그 산업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는 말을 듣지 않고도 노동자로서 그들이 무엇을 바꾸기를 바라는지 공적이고 집단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성노동에 대해 갖는 불만이 성노동을 그만두고 싶은 바람의 증거로 여겨져서는 - 종종 그렇게 되는데 - 안 된다. 불만은 다른 모든 노동자도 가지고 있으며 성노동에 대한 불만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 노동 문제 저널리스트인 새러 재프Sarah Jaffe는 자신이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싸움을 회상하며 “아무도 나를 식당산업에서 구조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p.82)

 

일 자체와 그 환경이 구별되는 것만큼 이 모든 것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충분히 다양하다는 주장과 함께 이 모두를 성노동이라 부를 때 정치적으로 유용한 점도 있다. 예를 들어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거리 성매매의 이미지 (대체로 유색인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차에 기대 서 있거나 차를 향해 걸어오는 이미지)는 강력하지만 아주 손쉽게 만들어진 합성물이다. 이것은 상상된 성매매 이미지의 전형으로서 모든 성노동자를 재현하는 대표적 이미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이미지는 대중적 소비를 위해 특정하게 만든 쇼일 뿐이다. 성노동자들의 몸은 그들에게 동정심이 든다고 주장하는 이들, 전형적인 재현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들, ‘도와’주고 싶다는 이들의 지지를 받아 재현될 때조차 거의 제대로 보여지지 않으며 도시의 부패, 여성혐오, 착취와 같은 교환 가능한 상징물 이상의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드물다.

(p.103)

 

성노동자들의 노동이 평가절하받는 동시에 이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왜 성노동이 노동이라고 주장하는지에 대한 이유다. 그러나 이 주장을 성노동은 그것이 ‘좋은’ 노동인 한 노동이라거나 그 일을 무척 좋아하는 한 노동이라고 하는 무비판적인 생각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노동자들은 자신이 가진 직업에 애정을 보여야 한다고 기대받는 것에 익숙할지 모른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있는 구경집peep show인 러스티 레이지Lusty Lady 관리자가 이 직업은 ‘재미’를 위한 것이라는 말을 노동계약서에 넣으려고 했는데 댄서들이 이를 거부했다). 성노동자들이 그 일을 즐거워해야지만, 그 일을 사랑해야지만, 그 일에서 힘을 얻어야지만 일터에서 권리를 가질 자격을 획득한다는 주장은 명백히 퇴행적이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그 일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려는 요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108)

 

모든 여성이 ‘창녀 낙인’이 찍힐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이는 바로 창녀들이었다. 창녀 낙인은 페미니스트적 개입으로 제안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왜 단 하나의 보편적인 여성 계급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해준다. 게일 페터슨Gail Pheterson은 1996년에 『매매춘이라는 프리즘 The Prosititution Prism』에 같은 제목으로 실은 글에서 “창녀 낙인은 여성다움 자체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변칙적인 혹은 금지된 여성다움에 부착된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창녀’라는 표식의 전제조건이기는 하지만 전적인 조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라고 적었다.

이는 성노동을 하지 않는 많은 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성노동자들은 질 네이글이 ‘강제적 덕성compulsory virtue'이라 명명한 것을 어기고 있거나 어겼다는 이유로 창녀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 표현은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가 ’강제적 이성애compulsory heterosexuality' 때문에 레즈비언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명명한 용어를 재활용한 것이다. 네이글은 창녀 낙인이 “덕성을 갖추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덕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필요”하다고 썼다. 강제적 이성애의 경우에서처럼 강제적 덕성은 일련의 행동, 다시 말해 남자와 성교하기, 그것에 대해 조신하게 구는 착한 소녀 되기 등을 만들어내는 것과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통제체제(퀴어 처벌하기, 창녀 구금하기)를 구축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네이글은 “창녀에 대한 처벌이나 낙인 때문에 고통당하는 데 실제 창녀일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창녀 낙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 다시 말해 차이를 가치 있게 여기고 성거래 안팎에 있는 여성들 사이의 연대를 발전시킬 방법을 제시해준다.

(p.133)

 

대중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창녀를 기대하게끔 길들여져 있을 때, 왜 커밍아웃을 하는 어떤 성노동자들은 결코 성노동자처럼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하려고 애를 쓰는지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얼마나 그 일이 자신에게 힘을 갖게 했는지에 대해 또는 그들이 어떤 생존자들인지에 대해서만 말하라고 요청받는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착실하게 살아왔는지,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어린 여자애들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청중을 설득해야만 한다.

종종 오직 헤픈 여자들을 모욕 주기 위해 “헤픈 여자 모욕 주기”라는 말을 쓸 때와 같이 이런 행위는 연대의식을 갉아먹는다. 이것은 무엇보다 순서 정하기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단지 섹슈얼리티와 젠더로 인해 추방된 이들을 괴롭히는 순서를 다시 정하는 일일 뿐이다. 우리 모두가 창녀일 수 있을 때 성노동 내부에서 처녀/창녀 위계를 재발명하는 것은 위험하다.

(p.139)

 

포르노와 스트립쇼는 여성을 성애화하는 주범이라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포르노와 스트립쇼를 그런 면에서 비난하는 이들은 우리가 하는 노동에 대한 재현(봉, 가죽 끈, 음모를 민 음부)에만 초점을 맞출 뿐, 우리가 하는 노동 자체, 우리의 삶 자체는 모른다. 종종 비판자들은 진실에 가까운 말도 한다. 고객이 욕망하는 것을 마치 우리도 욕망하는 것인 양 연기하는 것이 성노동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고객으로 하여금 우리의 섹슈얼리티를 규정하도록 허용하는 일과 같은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이 재현 영역 외의 것을 건드리는 경우는 성노동자들이 성애화의 희생자들이며, 그들이 모든 여성의 성애화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때다. 이것은 성노동자들이 ‘허위의식’의 희생자라는 구시대적 주장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단지 이제는 약간의 사회과학과 제2물결 때보다 더 작아진 속옷이 등장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p.150)

 

성노동은 단순히 성행위가 아니다. 성노동은 쇼다. 역할을 수행하고 기술을 보여주고 직업적 경계 안에서 감정이입을 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일이다. 이것이 간호사, 상담 전문가, 보모의 노동이라고 하면 이 모든 것은 쉽게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성노동이 노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한 성애화된 형식의 노동과 섹슈얼리티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p.157)

 

성노동 반대론자들이 성애화와 여성의 이미지로부터 이윤을 얻는 이들을 공격할 때 그 공격은 편협하고 반동적일 수 있다. 비판자들은 주류와 성경제, 미디어의 관계를 공존이 아닌 일종의 오염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고, 성적 이미지를 시장 혹은 더욱 광범위한 사회 영역에 위치시킬 능력 또는 의지가 없다. 그저 단순히 성적으로 수렴된 경제의 가장 가시적인 윗부분을 제거하는 것으로는 성애화가 재강화한다고 말해지는 것, 즉 그 외의 경제가 갖는 근본적인 불공평함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 운동들은 그저 여성의 몸을 지우는 것으로 시작해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p.165)

 

성노동 경험은 폭력 경험 이상의 것이다. 모든 성노동을 폭력 경험으로 환원하는 행위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폭력만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노동자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어진다. 그들이 처한 운명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면 그들의 쓸모는 오로지 해석하는 이들의 선입관에 도움이 되는 증거를 제공하는 데 있을 것이다. 반성매매 구조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성노동자들은 소위 ‘전문가’인 저널리스트, 영화감독, NGO 직원들이 만들고 이윤을 얻고 권력을 구축하는 동정적 포르노 안에서가 아닌 한 역할도 없고 그 역할조차 가축과 같은 지위의 한정된 역할을 맡는 이들일 뿐이다. 한편, 성노동자들이 진짜 차별, 희롱, 폭력을 맞닥뜨릴 때 그것은 - 그것이 아무리 끔찍한 것이라 예상될지라도 - 본래 성노동에 내재해있는 경험으로 치부된다. 이러한 반성매매 관점은 성노동에 대해 일반인이 좀더 공감하는 관점이라고 주장되지만, 이 관점은 성노동자들을 불신하고 그들을 포기하는 관점과 동일한 이데올로기다. 둘 다 성노동에 학대가 내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성노동자가 강간 피해를 당했다고 신고한다면, 글쎄, 그때 그녀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p.176)

 

매춘인이 승리할 때, 모든 여성이 승리한다.

- 가사노동 임금화를 요구하는 흑인 여성들, 1977

 

‘갈보들과 주부들’, 이 여성들의 집단을 계급동맹으로 생각하기란 지금은 매우 어렵다. 갈보와 주부는 일반적으로 동맹이 불가능해 보이는 집단이다. 두 집단은 너무도 자주 (우파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좌파들에 의해서도 똑같이) 하나의 경제적 고리에서 서로 반대편을 점하면서 남성의 임금노동을 통해 생계소득을 얻는 경쟁관계에 놓인 두 계급의 여성들로 간주된다. 반면, 그들의 노동은 또한 적법하지 않다고 간주된다. 우리는 돌봄과 성행위는 무료로, 진심과 사랑으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주부는 자신의 정당성을 임금을 좇지 않는 것으로 유지하고 갈보는 임금을 요구하는 것으로 그 관습을 깬다. 그들 둘 다 여성이 남성에게 생계를 의존하도록 만든 바로 그 동일한 체제 때문에 폄하되고 제약받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체제로부터 함께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

(p.189)


*Playing the Whore는 이 책의 원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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