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비평적으로 꽤 좋은 반응을 얻은 <로스트 인 더스트>는 애초에 ‘북미 다양성영화 흥행 1위’라는 카피로 홍보되었다. 다양성영화와 같은 수식어구가 얼마나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지에 대해서는 의아하지만 적은 상영관과 저조한 오프닝 성적에도 불구하고 꽤 높은 흥행성적을 낸 것은 분명하다. 포스트 서부극, 버디 무비, 케이퍼 무비 등 이 영화를 수식하는 장르의 이름들과 금융자본에 잠식당한 현대 서부가 무대라는 점이 관객들을 어떻게든 자극했으리라 여겨진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비참한 삶과 남겨진 딜레마는 현대 영화의 주된 관심거리 중 하나가 되었는데, <로스트 인 더스트>는 그것을 장르적인 틀 안에 녹여낸 셈이다. 이 영화가 장르 영화, 그 중에서도 서부극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서부의 풍광이나 카우보이 차림의 등장인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추동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구조가 있고, 그 안에서 이야기가 굴곡을 겪으며 종결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어떤 영화들의 풍경은 그대로 남아 이야기의 종결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모순을 품고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것이 위대한 장르 영화의 형식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로스트 인 더스트>의 좌표는 어디쯤에 찍힐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몇 개 없는 선택지, 뭉개지는 경계등을 그리며 마치 서부(로 대표되는 현대 미국)의 운명을 예감하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없이 기만적이다. 영화가 강변하는 세계의 질서와 종결 방식의 미묘한 차이가 이러한 감상의 근거인데, 나는 이 지점이 흥행의 이유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텍사스 미들랜즈 은행의 각 지점에서 은행 강도 사건을 저지르고 있는 형 테너(벤 포스터)와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 형제를 뒤쫓는 보안관 마커스(제프 브리지스)와 알베르토(길 버밍엄)는 한 은행 지점 앞에 있는 식당에서 막 주문을 하려고 하는 중이다. 주문을 받는 노인은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라고 한다. 요컨대 이곳의 메뉴는 정해져 있되, 구운 옥수수나 강낭콩 중 먹기 싫은 것을 말하면 그것을 빼주겠다는 것이다.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이 장면은 미국이 다다른 딜레마에 대한 냉소의 장면으로 보인다. 선택할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형제가 은행을 털고 마치 황야를 달리는 카우보이들처럼 낡아빠진 차를 타고 도로를 질주할 때, 그들 곁에 보이는 것은 집과 땅을 담보로 대출을 종용하는 광고판 따위들이다. 선택의 딜레마는 은연중에 이분법의 세계를 전제한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인 세상. 형제는 지금 어머니에게서 상속받은 석유가 나오는 땅의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은행을 터는 중이다. 지키지 못한 땅은 남의 것이 되어버린다. 이분법은 인물들 사이에도 적용된다. 토비, 테너 형제와 마커스, 알베르토 사이에도 선이 그어지지만 토비와 테너 사이, 마커스와 알베르토 사이에도 선은 그어진다. 토비와 테너는 서로를 위해 싸우고 강도질까지 함께 하는 형제이지만 토비에게 테너의 돌발성은 계획에 포함되지 않는 위험이다. 한편 마커스는 내내 알베르토의 인디언 혈통을 놀림감으로 삼는다. 의식적인 적대는 아닐지언정 두 사람 사이의 선은 미국의 역사, 혹은 인종과 결부되어있다.


영화는 그 경계들을 뭉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아마도 마커스의 마지막 사건이 될 은행 강도 사건을 추적하는 마커스와 알베르토의 경계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아 보일 정도다. 더구나 알베르토는 견고한 은행 건물을 바라보며 변해가는 세상을 탄식하는 노인인 마커스에게 땅을 빼앗고 빼앗기는 사람들의 처지에 대해 말하지 않던가. 그에 따르면 이제 우리는 모두 빼앗긴 자의 위치에 가있는 셈이다. 잠깐의 편의점 장면에서 보이듯이 토비는 테너 못지않은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혹은 토비의 큰아들은 테너를 꼭 빼닮았다. 더 나아가면 이 두 쌍의 인물들조차도 서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치하는 토비와 마커스는 거의 똑같은 차림새로 서로를 대하고 있다. 변화하는 세계 앞에서 두 사람의 처지는 굳이 선을 그어 나눌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자들이 하는 선택들도 서로 큰 차이가 없는 것이 된다. 요컨대 영화의 중심이 되는 사건을 추동한 것은 21세기의 서부라는 공간이다. 이제는 이 땅을 집어삼킬 차례의 자리에 현대 금융자본이 가있고 그 땅에서 무수히 많은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발생했다가 종결될 것이다. 선택의 의미도 경계의 의미도 잃어버린 현대의 서부를 배경으로 두고 영화는 곧 소멸해버릴 이야기를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결말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큰 걸림돌 없이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가장 납득할 수 없는 지점은 다름 아닌 목격자들의 진술이다. 후반부의 총격전이후 마커스는 은퇴한다. 마커스는 다시 한 번 사무실로 돌아가 사건의 후속 수사에 대해 듣기를 원한다. 마커스의 후임이 설명하기로 토비는 은행 강도를 저지를 위인은 되지 못하며 지금 추적중인 자는 테너가 감옥에서 만난 적이 있던 또 다른 전과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 사람을 본 결정적인 목격자들을 알고 있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을 법한 식당에서, 테너는 돌발적으로 근처의 은행에서 돈을 훔쳐 나온다. 그러는 동안 토비는 그 식당의 종업원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처음에 종업원은 토비에게서 200불의 팁을 받았으므로 그 팁을 증거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증언을 거부했다. 그러나 후반부에 관객은 그 200불은 결국 증거로 압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토비의 사진을 보고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식당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처음 사건이 발생하고 마커스와 알베르토가 식당에 들렀을 때 그들은 형제의 인상착의에 대해 말하면서 하루하루 강도질로 살아가는 인생이 한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는 토비의 사진을 보며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들은 테너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이 진술들의 기능은 명확하다. 토비는 결코 수사의 결과로 검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종업원과 다른 손님들의 진술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식당 안 손님들에게 카우보이처럼 입었다는 두 형제는 여느 범법자와 다를 바가 없는 한심한 놈들이기 때문에 기억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업원은 다르다. 그녀는 토비에게 관심을 보이며 잠깐이나마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했던 인물이다. 물론 그녀는 토비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왜 기억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볼 수 있다. 그녀가 200불의 팁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바로 그녀에게 딸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인 목격자로서 그녀는 토비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토비가 은행 강도를 계획하고 위험을 감수한 이유가 바로 그의 자식들을 위해서였다는 것이 그 망각의 이유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식당 손님들과 종업원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진술들은 토비의 익명의 또한 아버지의 자리를 지키는 위치에 있다.


결말에 이르러 마커스와 대면한 토비의 자리는 비정하거나 적어도 쓸쓸하게 느껴진다. 마치 그것은 서부의 운명처럼도 보인다. 결국에는 소멸될 것을, 그렇게 지켜진 자리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을 알면서도 왜 목격자들의 진술은 굳이 그 자리에 끼어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영화가 지켜낸 최종적 형태의 구도를 이야기하며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후반부, 테너는 토비가 도망갈 시간과 길을 확보하기 위해 1대 다수의 총격전을 벌인다. 이때 알베르토가 테너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게 되고 마커스는 이에 복수하기 위해 바위산에 올라 테너의 머리를 겨눈다. ‘평원의 제왕, 코만치’라는 말을 내뱉으며 총격전에 도취된 테너는 마커스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가히 서부의 방식이라 할만하다. 이 총격전으로 인해 주요 서사에서 퇴장한 인물은 테너와 알베르토 두 명으로 버디 무비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영화에서 각각 버디들의 한 축을 담당한 인물들이다. 게다가 이들에게 배치된 서사와 감정도 가볍다고만은 볼 수 없다. 테너는 사고만을 일삼으며 어머니로부터 유산 한 푼 받지 못했으나 동생을 위해 무엇이든지 감행하는 인물이다. 두 형제는 해가 지는 농장에서 아이들처럼 순수한 한 때를 보여주기도 했다. 알베르토는 은퇴를 앞둔 마커스의 농담을 받아주며 자신도 그처럼 한발씩 늙어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마커스와 함께 때때로 변해가는 서부의 풍광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죽음은 서사적 차원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받아들여진다. 서부가 만들어낸 비극적 이야기의 일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영화가 제거한 것은 테너로 대표되는 돌발적인 위험이자 알베르토로 대표되는 타인종 혹은 감수해야 할 역사이다. 영화는 경계가 지워진 서부의 풍경 속에서 인물들이 겪는 불행과 마주치는 난감함 등을 덩어리로 묶으면서도 기어이 그들을 제거한다. 이미 다 뭉개져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줄 알았던 경계는 사실 영화가 끝나기 위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해야 했던 것이 된다. 각각 경계의 바깥을 지워버리고 나서야 토비와 마커스는 비정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 이들은 비통할지언정 서부의 세계는 경계 안에서 한동안 안전하게 유지될 것이다. 혹은 이들의 진정한 바깥은 서로의 위치인 무법자나 보안관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폭력과 유색인종이다. (애초에 여성의 자리가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테너와 알베르토가 퇴장하고 결국 토비가 오른 자리는 무엇인가. 돌아올 아이들을 기다리며 집을 고쳐주는, 또는 총을 들어 집을 지키는 사람. 이 자리는 미묘하게 서부사나이의 위치에 닿아 보인다. 그러나 토비는 우리 기억속의 서부사나이보다 집에 가까이 가있다. 게다가 토비는 아버지가 아닌가. 아내와는 이혼했고 그 집에서 살지도 않으며 자신의 몫이 하나도 없는데도 그런가. 나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토비는 결국 아버지이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 그는 대물림되는 가난을 끊어버리기 위해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다. 자신의 아들들만큼은 가난에 전염되게 둘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손에 피를 묻힌 자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폭력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수용된다. 때문에 마커스는 한 발 물러나고 식당의 종업원은 그를 기억하지 못함으로써 용의선상에 오르지 못하게 하지 않았는가. 토비의 자리는 이 세계에서는 필연적으로 지켜져야 했던 것이다. 가난한 아버지가 아들들을 위해 폭력으로 지켜낸 땅, 은밀하게 작동하는 경계의 땅. 결국에는 그것이 이 영화의 배경이었던 셈이다. 가난한 이들이 마주하는 딜레마와 경계들은 모두 위장된 것이고 이곳 서부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적일(‘코만치’의 뜻)뿐이라고 말했으면서 사실은 경계를 복원하고 아버지의 자리를 복권시키는 영화를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마주해야 할까. 이 영화가 정말로 서부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로스트 인 더스트>는 세계를 비정하게 바라보는 척 하면서 무언가가 제거된 과거의 한 점으로 돌아가려는 영화로 보인다. 비참한 현실 앞에서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바라보고 있는 영화인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다수 관객들의 무의식과 공명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흥행성적과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별개의 일로 취급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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